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5)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45)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1.1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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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볼까 하는데 어째야 하는지 난감하다.” 글? 그거 그냥 쓰면 됩니다. ‘난감하다’ 하신 분이 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예요.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어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였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 물음 앞에서 뭐라 해야 할지 내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보다 더 난감했었는데, 불쑥 한 말이긴 하지만, 물은 사람에게 ‘그냥 쓰면 된다’니 이보다 난감하게 하는 답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생각해도 그 말 밖에는 할 게 없어요. 글을 쓴다는 것, 이건 과학이 아니라서 셈처럼 1+1=2 이런 공식이 없으니까요.

듣는 말과 보는 말은 공정이 달라서, 듣는 말보다 보는 말이 훨씬 또렷해 보인다고, 일목요연(一目瞭然)이란 낱말도 생겼겠지만, 정말이지 우리가 어디서 들은 것이나 본 것이나 제대로 바로 듣보았는지 두 번 세 번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강경’에는 석가께서 하신 말씀을 ‘나는 이같이 들었다(如是我聞)’하고 적었습니다. 한껏 듣고 보고 기억하셨겠지만, 그분들은 아셨던 거지요. 사람 마음에는 제 나름이 있어서 듣본 것을 진실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펜을 들고 앉으면 속에 끓던 말이 어디로 죽자고 달아나요. 나는 그걸 백지의 공포라고 합니다. 소리 기호인 말은 태어나서 이제까지 한시도 쉼 없이 배우고 익히고 써서 임의로워졌지만, 말을 기호로 쓰는 글자는 배우고 익힘이 늦고 더딘데다, 쓰기는 더더욱 안 하고도 잘 살 수 있는 까닭에, 몸에 익지 않아서 쓰려고 하면 앞이 캄캄해지는 거지요. 게다가 말은 소리가 있어서, 그 소리에 실린 감정이나 표정이 함께 있어서 듣는 이의 이해를 돕는데, 글자에는 소리도 표정도 없어서, 오직 그려진 기호로 내 생각과 감정을 전달해야 해서, 힘들게 합니다. 글쓰기도 말하듯 수월수월하면 좋겠지요. ‘때때로 배우고 익혀서 날로 쓰기에 편하게 할 따름이다.’ 세종대왕님 말씀입니다.

어느 영화관에서 재미나는 장면이 한창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일어섰다지요. 뒤에 앉아있던 어떤 분이 ‘할매’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앉아 버렸다는 이야깁니다. 글자로 쓰면 그냥 ‘할매’인데, 그 영화관에서 소리 기호로 쓰인 ‘할매’는 호칭이 아니라 앉으라는 의미라는 걸, 말한 이나 들은 이나 같은 뜻으로 이해했다는 거지요. 글자로 ‘할매’라고 써놓으면 이 낱말에는 감정도 생략된 말도 안 보입니다. 글자에는 감정도 정서도 들어있지 않지요. 그래서 이 글자 말에 정서가 배어들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할매. 할매? 할매!

보고 들은 걸 쓴다. 여기에 ‘생각한 것’을 붙이면 더 쉬워 보입니다. 내 마음대로 쓰면 되니까. 이게 탈을 냅니다. 실제로 내가 하는 말을 글자로 적어보면 ‘말도 아니다’를 만나게 되죠. 기억된 것이 생각을 만나면 일부러건 아니건 내 나름에로 변신하느라 어질러진다는 겁니다.

말이 되게 써라. 글을 쓰려면 이걸 먼저 해야 한다네요. 이가 맞게 말에 줄이 서야 한다는 거지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때때로 배우고 익혀서 날로 쓰기에 편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시저 이야긴가요? ‘왔다. 싸웠다. 이겼다.’ 이도 맞고 줄도 바르고 깔끔하기도 한데.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하면 더 멋이 있어지나요. 앞에 글줄보다 뒤에 글줄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연분홍 치맛자락’ 같지 않나요. 상상의 산물은 아닐지라도 글줄에 정서가 스며들었을 때, 글은 눈을 감기는 향취를 지닙니다. 그게 글을 쓴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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