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7)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7)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9.2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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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수필에 허구를 써도 되는가? 이 문제로 한국 수필계가 시끌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1980년에 정진권 선생이 ‘수필문학의 이론 모형 연구’에서 ‘수필이 허구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데서, 이른바 ‘수필의 허구론’이 문제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1990년 11월에 ‘한국수필문학진흥회’에서 ‘수필에서의 체험과 허구’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어 ‘수필의 허구 수용론’을 논했는데, 그때 거기서 ‘수필은 허구를 쓰면 안 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합니다.

윤모촌 선생이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주장한 것처럼 ‘상상의 힘을 빌린다는 문학이라는 개념에 매달린 나머지 수필의 본질에 대해서는 정작 허구와 상상력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필의 본질이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글이라 하였다. 작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 체험한 것, 느끼고 생각한 것, 이 세 가지 요소가 정직하게 갖추어져야 한다’고 여긴 사람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수필의 본질이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글이므로 상상의 힘을 빌려 쓰는 문학일 수 없다는 거지요. 80년에서 90년까지 옥신각신 10년을 보내고도 눈이 그렇게밖에 떠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허망한 눈은 아직도 많이 유효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격은 윤리나 도덕에서 논할 것이지, 문학(말꽃)에 매일 물건 같지는 않습니다. 문학(말꽃)에 인격을 디밀어서야, 될 말이 아니지요.

수필이 인격의 글이라면서 인격의 글이어야 한다면, 수필은 말꽃이 되는 문학과는 동이 한 참 뜬 물건이 되는데, 그런 글을 쓰면서도 수필이 왜 문학이 아니냐고 왜 수필을 문학이 아니라고 하느냐고, 개탄들 합니다. 욕심이 많거나 소양이 부족해서 문학과 인격을 잘 가려보지 못해서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생전에 물어보진 않았지만, 정진권 선생에게 왜 그런 말을 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고 탓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이 ‘허구와 수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필 문학의 허구성을 말한 것은 두 가지 의도에서였다. 첫째는 수필을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믿는 통념을 부정하자는 것이요, 둘째는 수필 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대해보자는 것이었다.’ 에세이·수필이 말꽃이 아니더라도 넓은 의미의 문학으로서 말다운 말이 되는 데에도 이 주장은 영원히 유효한 것입니다.

소설가 오가와 요코는 누구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몸소 겪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 마음에 맞는 형태로 또는 자기 마음의 형태에 맞도록 요리조리 주물러서 받아들이려 한다는 겁니다. 부러 하는 짓이 아니라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이런 행위가 다시 내 몸 밖으로 이야기가 되어 나올 때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는 엄밀히 말하면 사실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본래 겪은 일을 ‘있은 그대로’ 말한다는 것은 사실 가망 없는 일이니까요. 내 경험을 그대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은 이미 상상의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며, 게다가 내가 무엇이라 말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면, 봤거나 기억돼있는 물건이나 이야기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쓰임에 맞게 변형되어 나옵니다. 이게 말이고 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이렇거늘, 말꽃이어야 하는 에세이·수필에서야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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