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수와 함께 하는 토박이말 나들이[78]
이창수와 함께 하는 토박이말 나들이[78]
  • 경남일보
  • 승인 2022.07.2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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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아랑곳한 토박이말(1)
오란비(장마)가 그야말로 오래오래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릴 때도 있고 적게 내릴 때도 있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 비가 잦은 요즘 우리는 비 이름을 얼마나 알고 사는지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우리말에 비를 나타내는 말이 몇 가지나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도 다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데 제가 아는 것만 거의 마흔 개 남짓 됩니다. 다른 겨레나 다른 나라 말과 견주어 봐도 이렇게 꼼꼼하게 비를 가르고 저마다 이름을 붙여 놓은 말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말이 남다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좀 자랑삼아 우리말이 그만큼 뛰어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마흔 가지나 넘는 비 이름을 다 알려드릴 수는 없고 우리가 살면서 알고 쓰면 좋을 토박이말을 몇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철에 따라 붙인 비 이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바뀌는 철에 따라 오는 비 이름도 서로 다르게 지어 부르셨지요. 봄에 오는 비는 ‘봄비’, 여름엔 ‘여름비’, 가을엔 ‘가을비’, 겨울엔 ‘겨울비’라고 하죠. 그런데 봄에는 비가 와도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고 ‘일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봄에 비가 넉넉하게 오면 농사가 잘되기 때문에 ‘쌀비’라고도 했답니다. 여름에는 이런저런 해야 할 일이 많은 철이지만 비가 오면 낮잠을 잘 수 있어서 ‘잠비’라고 했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인 쌀로 떡을 해 먹으며 쉴 수 있어서 ‘떡비’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농사일이 없는 겨울에는 비가 오면 빚어 놓은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다고 ‘술비’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철에 따라 사는 삶에 맞춰 다르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참 놀랍고 재미있습니다. 이런 낱말 하나하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더욱더 가르치고 배워야 하며 나날살이에 살려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어른들께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에 따라 언제 일을 하고 쉬었으며 무엇을 즐기며 사셨는지 알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이어서 비가 내리는 만큼(정도)에 따라 붙인 비 이름을 살펴보겠습니다. 거의 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안개’, ‘구름’을 배우고 ‘비’와 ‘눈이’ 내리는 까닭을 배우셨을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 ‘안개’와 ‘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이 안개와 비 사이에 ‘안개’도 아니지만 ‘비’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아시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 놓으셨습니다. 그게 바로 ‘는개’입니다. ‘는개’는 ‘늘어진 안개’가 줄어서 된 말이라고 합니다. 안개가 늘어지는 것을 어떻게 보셨을까 생각하니 더 놀랍기만 합니다. 그만큼 꼼꼼하게 살피는 힘이 세셨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지잼’은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도록 잠을 재울 만큼 조금 오는 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오랜 가뭄으로 메마른 땅에서 풀풀 날리는 먼지를 겨우 재워 놓을 만큼 적게 내리는 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속에는 오랜 가뭄에 타들어 가는 옛 어르신들의 애타는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는 말이지 싶습니다. 이런 먼지잼이 내릴 때마다 목을 빼고 ‘목비’를 기다리셨을 것을 생각하니 제 목도 절로 길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목비’는 ‘모낼 무렵 한목 오는 비’를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요즘과 같이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여름철 한낮에 달콤한 잠을 부르는 비를 만나시거든 ‘잠비’라는 말을 떠올려 써 보시기 바랍니다.



(사)토박이말바라기 늘맡음빛(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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