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배달오토바이와 양심냉장고
[기자의 시각]배달오토바이와 양심냉장고
  • 정희성
  • 승인 2021.11.21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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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당시 경쟁 프로그램에 밀려 시청률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심 끝에 ‘이경규가 간다-숨은 양심을 찾아서’라는 코너를 만들었다.

1996년 4월에 첫 방송이 된 이 코너는 차량과 사람의 이동이 뜸한 야간이나 새벽 시간 때 도로 인근에 숨어 지켜보다가 신호를 지키는 차량이 등장하면 상품으로 양심냉장고를 주는 내용이었다. ‘도로위의 양심’을 ‘계속 잘 보관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첫 촬영 때 모든 차량들이 멈춤(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몇 시간을 촬영했지만 신호를 지키는 차량은 나타나지 않았다.

MC와 제작진들은 촬영을 마무리 하려고 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새벽 4시 13분께 소형차 한 대가 횡단보도 앞 정지선에 맞춰 섰다. 그리고 이 차는 신호가 적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자 그제야 출발을 했다. MC와 제작진들은 감격에 겨워 그 차량을 세웠다. 차량 안에는 장애인 부부가 타고 있었다. “왜 신호를 지켰나요”라는 MC 이경규의 질문에 지체장애인 운전자 이종익씨는 띄엄띄엄 “내가 늘 지켜요”라고 대답을 했다. 이 코너는 방송 직후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시청자들의 요구로 방송 역사로 최초로 일주일 뒤 정규방송 시간에 다시 재방송되기도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없는 새벽시간, 그럼에도 정지선에 차를 세우고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린 장애인 부부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과 함께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첫 방송이 나간 후 25년이 흘렀고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저녁에 운동 겸 산책을 하러 동네를 걷다보면 수많은 배달오토바이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굉음은 사람들의 귀를 아프게 하고 준법정신은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았는지 교통신호는 아예 무시한다. 아이들이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있어도 아랑곳없이 빠른 속도로 그 사이를 지나간다. 인도 위를 달리고 역주행도 서슴지 않는다. 아주 가끔 신호를 지키는 배달오토바이가 신기할 정도다. 물론 사고 위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호를 지키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25년 전 생방송으로 지켜봤던 이경규의 양심냉장고 첫 방송이 항상 떠오른다.

취재부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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