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40]시샤팡마 남서벽 신루트 개척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40]시샤팡마 남서벽 신루트 개척
  • 경남일보
  • 승인 2020.10.0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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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8000m 고봉 신루트 개척
한국 히말라야 등반 40년 만에 8000m 신루트로 시샤팡마 정상에 선 박정헌 대원(위)과 강연룡 대원
한국은 1960년대 초반부터 히말라야 등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산악 선진국과 비교하면 50년 늦었다. 그러나 한국은 짧은 시간에 수많은 등정 업적을 이뤄냈다. 1977년 고상돈 대원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후 한국 산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 산악인들은 국내 최고봉이 2000m도 되지 않는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보였다. 한국은 8000m 14개 봉우리를 오른 산악인은 박영석·엄홍길·한왕용·김재수·김창호·김미곤 등 6명을 배출했다. 하지만 세계 산악계는 한국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세계 산악계는 왜 한국을 주목하지 않는 걸까?

그것은 바로 한국산악계가 등로주의가 아닌 등정주의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8000m 등반 루트 가운데 한국인이 개척한 루트는 없었다. 일부 루트를 변형해 등정했지만 순수하게 새로운 루트로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02년 시샤팡마…첫 코리안 루트 도전

한국인의 손으로 직접 만든 히말라야 등반길을 열기 위해 2002년 3월 25일 경남산악연맹 소속 박정헌·강연룡·유순욱 대원이 시샤팡마 등정을 위해 네팔 카트만두로 향했다. 시샤팡마 원정대는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고봉에 새로운 루트를 만들기 위해 구성됐으며 이들이 택한 루트는 시샤팡마(8046m) 남서벽이었다. 당시 시샤팡마 원정대는 경남 산악인은 물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등반력을 자랑하던 클라이머들이 참여했다. 박상수 원정대장을 중심으로 박정헌 등반대장·김주형·강연룡·김미곤·변성호·유순욱·모상현 대원이 선발됐다.

 
시샤팡마 남서벽 루트. G가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이 처음으로 길을 만들었다.
시샤팡마 남서벽은 등반 루트 대부분이 바위로 구성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7500m~8027m 정상까지는 경사도 70도 이상의 암벽지대로 형성돼 있는 세계 최고의 난이도로 악명이 높았다. 원정대가 택한 이 루트는 그동안 누구도 도전하지 못한 가장 어려운 코스로 남아 있었었다. 이번 등반의 가장 큰 의미는 히말라야 8000m에 새로운 루트를 내는 것도 중요했지만 셰르파를 고용하지 않고 대원들이 직접 등반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박상수 대장은 취지문에서 밝혔다. “우리는 등반 루트를 시샤팡마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로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최초로 8000미터 고봉에서 코리안 하이웨이 신루트를 개척하게 된다. 시샤팡마 남서벽에 등반 사상 7번째로 새로운 길을 만들겠다.”

결전의 땅…영혼의 나라 티베트로

원정대는 3월 31일 카트만두를 출발, 네팔~티베트 국경 장무로 이동했다. 그들은 니알람(3750m)을 거쳐 고소적응을 마치고 도보 카라반을 시작했다. 4월 4일 야크를 이용해 베이스캠프로 가기 전 실랑이가 벌어졌다. 원정대에 배정된 야크는 35마리였지만 실제로 10마리가 더 필요했다. 그들은 추가로 4000달러를 요구했다. 원정대가 가진 돈은 고작 400달러 정도. 결국 원정대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350~400달러를 줄테니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옮기던지, 아니면 그냥 돌아가라.” 원정대는 완강하게 말했다. 5시간의 줄다리기 끝에 추가 요금 300달러에 합의했다. 이날 오후 5시쯤 BC로 갈 수 있었다. 다음 날 그들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초원을 걸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이 많아졌다. 4700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4월 6일 해발 5100m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이 황량한 들판에 원정대원이 전부였다. 시샤팡마는 다른 8000m 산과 달리 많은 원정대와 트레커들이 찾지 않는 외딴 곳이다. 원정대는 이제 산을 오르며 외로움과의 싸움도 시작했다.

 
많은 눈이 내린 길을 야크들이 짐을 나르고 있다. 야크가 뚫은 길을 대원들이 힘든 카라반을 하고 있다.
절벽에 매달린 대원들…점심·물도 못 먹어

4월 8일 지내고 전진캠프로 옮길 식량과 장비를 분리하는 등 본격적인 등반 준비에 나섰다. 며칠간 내린 폭설이 멈추자 대원들은 4월 11일 11시간 등반 끝에 전진캠프(5500m)에 텐트 2동을 설치했다. 전진캠프에서 등반을 시작하는 남벽까지는 걸어서 3시간 정도를 더 걸어가야 했다. 4월 15일 남벽에 도착한 대원들은 등반을 시작했다. 박정헌 등반대장이 선두로 나섰다. 남벽은 당초 예상과 달리 경사가 심했다. 바위에는 눈보다도 얼음이 더 많아 속도는 나지 않았다. 강연룡은 당시를 이렇게 적었다. “선두는 조심스럽게 올라 하켄을 박고 로프를 연결했다. 그리고 또 올라 하켄을 박고 로프를 묶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다. 너무나 단순한 작업이지만 매우 위험했다.”

대원들은 경사가 심해 등반할 때 대부분 바위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점심을 거르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한낮에는 더위에 맞서야 했다. 오후 7시가 넘어서 그들은 6200m에 도달했다. 가져온 짐을 안전하게 묶어 놓고 하산을 서둘렀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 전진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4월 16일 대원들은 7000m까지 진출할 계획이었지만 하켄이 부족해 BC로 하산하기로 했다. 이틀간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회의를 가졌다. 남서벽 신루트는 워낙 경사가 심해 하켄이 예상보다 많이 소모됐고 등반 속도는 떨어져 캠프 건설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좋은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남서벽 초입을 넘어선 대원들이 설사면을 오르고 있다.
“어려운 길이라 우리가 왔다”

일부 대원은 “새로운 루트를 포기하고 그냥 노멀 루트로 등반하자”고 했다. 박상수 대장은 잘라 말했다. “신루트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으면 아무나 다한다. 누가 노멀 루트로 등반하겠는가?”

원정대는 2개조로 운행하고 1개조는 루트를 만들고 나머지 1개조는 짐을 수송하기로 했다. 4월 18일 전진캠프로 진출한 대원들은 다음 날 아침 8시 박정헌·강연룡·김미곤 대원이 루트를 만들기 위해 출발했다. 낮 12시 6200m에 도착한 원정대는 넓은 설원지대에서 길을 만들어갔다. 강연룡이 선두에 섰다. 대원들은 경사가 60~70도에 달하는 빙설벽에서 20㎏가 넘는 배낭을 메고 오르는 경험하지 못한 등반을 하고 있었다. 오후 8시 해발 6700m 지점에 1캠프 사이트에 도착했다. 능선 위에 눈과 얼음을 깎아내고 텐트 1동을 겨우 쳤다. 그들은 밤 10시가 넘어서 텐트로 기어들어갔다. 거의 14시간 만에 휴식을 취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좁은 텐트에 건장한 산악인 7명이 앉기에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뜨거운 차 한잔으로 그들은 앉아서 긴 밤을 보냈다. 이튿날 강연룡·김미곤·모상현 대원은 남아 있는 고정로프 400m를 설치하고 나머지 대원은 BC로 하산하기로 했다. 아침 10시 3명은 강연룡 대원이 선등했다. 루트작업을 시작했지만 햇볕이 없는 지역이라 추위에 떨어야 했다. 6시간 작업 끝에 7000m까지 진출한 후 하산했다.

 
유순욱 대원이 1캠프 앞에서 천길 낭떠러지를 바라보고 있다. 설사면을 3시간에 깎아내 만든 작은 텐트 하나에 전 대원이 생활해야 했다.
멀고도 먼 정상…지쳐가는 대원들

당시 원정대원들은 뛰어난 등반력과 체력을 소유한 대원들이었지만 시샤팡마 남서벽에서 극심한 체력을 소모했으며 전진은 더뎠다. 특히 경사가 심한 지역에서 식량과 장비를 셰르파나 고소 포터 도움 없이 대원들이 일일이 수송하다 보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4월 24일 강연룡·김주형·변성호·모상현 대원이 2캠프 설치를 위해 BC를 떠났다. 많은 눈으로 어려웠지만 4시간 만에 전진캠프에 도착했다. 다음 날 오전 8시 1캠프로 향했다. 로프에 등강기를 걸고 당기며 천천히 올랐다. 3시간 정도 오르다 휴식을 취했다. 갑자기 ‘쉬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돌들이 대원들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모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점심도 못 먹은 대원들은 갈증으로 목이 말랐다. 머리를 눈에 묻고 휴식을 취하는 짧은 순간 눈과 얼음으로 목마름을 해결했다. 강한 바람이 밑에서 불어왔다. 바람에 날린 눈들이 대원들을 괴롭혔다. 위에서는 작은 눈사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대원들은 몸을 웅크리고 벽에 달라붙었다. 계속되던 지겨운 오름짓은 9시간 만에 끝이 났다. 먼저 도착한 강연룡 대원은 눈을 녹였다.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눈발도 굵어졌다. 그는 녹인 물을 수통에 담았다. 오후 9시쯤 4명의 대원들이 모두 모였다. 밤새 강한 바람이 시샤팡마에 몰아쳤다. 다음 날 날씨가 좋지 않아 BC로 하산했다. 4월 27일 박정헌·유순욱·김미곤 대원이 1캠프로 향했다. 하지만 시샤팡마는 강한 바람이 온 산을 강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날릴 것 같은 바람에 눈이 미친 듯 흩날렸다. 아침이 밝았다. 대원들은 하나둘 텐트에 나서 눈 앞에 펼쳐진 베이스캠프 광경에 망연자실했다. 식당 텐트가 바람에 찢어져 나부끼고 있었다. 수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침은 처참하게 파손된 텐트에서 서서 먹었다. 공간이 생긴 텐트로 바람에 날린 눈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그날 저녁 1캠프에 있던 대원들도 긴급하게 돌아왔다. 그들은 강풍과 폭설을 뚫고 안전한 BC로 하산했다. 잔인한 4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첫 피치를 등반하고 있는 강연룡 대원.
전진캠프에서 1캠프로 향하는 대원들
강연룡·박정헌, 다시 2캠프로

5월 2일 등반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많은 인원이 로프를 깔고 전진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2명이 한 조가 되어 안자일렌하며 오르기로 했다. 강연룡과 박정헌 등반대장이 1조로 뽑혀 전진캠프로 향했다. 3시간 만에 도착한 그들은 자정께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날씨가 좋아지자 2캠프로 곧바로 직진했다. 아침과 저녁은 비스킷과 차 한 잔이 전부였다. 점심은 평소대로 먹을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 건너뛰었다. 5월 4일 해발 6800m 1캠프. 강연룡은 눈을 떴다. 그는 박정헌 등반대장에게 물었다. “등반할까요?” 박정헌은 답했다. “날씨가 이렇게 나쁜데 어떻게 출발하냐!”

강연룡은 전진캠프에 무전해 상황을 물었다. 그쪽에서는 날씨가 좋아 출발했다는 답변이 흘러나왔다. 오전 10시 강연룡·박정헌 대원은 급하게 차로 아침을 대신하고 등반에 나섰다. 12시쯤 7000m에 마지막으로 설치한 픽스 로프가 보였다. 여기서부터 2캠프(7350m)까지는 빙설벽과 록밴드를 넘어야 했다. 이들은 안전한 등반에 가장 필수적인 로프를 설치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체력을 낭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6㎜ 로프로 서로를 묶고 남서벽을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오르기 시작했다.

7350m 허공에 설치한 2인용 텐트

다행히 작은 쿨르와르가 록밴드를 가로질러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설벽을 오를수록 경사는 심해졌다. 만약 실수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들은 긴장했지만 침착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올랐다. 해가 질 무렵 두 번째 록밴드에 도달했다. 설벽이 끝나는 지점에 얼음을 깎아 2인용 텐트 1동을 설치했다. 공간이 너무 좁아 텐트 한쪽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들은 장비를 점검했다. 가스 3통, 일회용 차 8개, 비스킷 2개, 미니빵 10개, 침낭 1개, 아이스 스크루 2개, 6㎜ 로프 120m, 5㎜ 로프 30m, 그리고 록 하켄 몇 개가 전부였다. 점검을 마친 그들은 눈을 녹여 물을 만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제대로 발도 펴지 못한 힘든 상황에서 하얀 밤을 지새웠다.

5월 5일 새벽 3시 눈을 녹였다. 차로 아침을 해결했다. 그러나 선뜻 텐트 밖을 나서지 않았다. 당초 출발하기로 한 5시를 훨쩍 넘어 시계는 6시를 향해 열심히 가고 있었다. 강한 바람과 함께 영하 23도의 강추위가 엄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새벽 6시 30분 어렵게 텐트를 나섰다. 빙벽을 오르고 빙벽·암벽 혼합지대를 통과했다. 지친 그들에게 150m 록밴드가 가로막았다. 4시간 사투 끝에 그들은 마지막 힘으로 가장 힘든 구간을 넘어섰다. 강연룡은 손가락이 아려 왔다. 장갑을 벗은 그는 빛을 잃어가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동상!” 그는 손가락보다는 정상이 나타나지 않은 것에 조바심을 느꼈다. 이제 시계는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국 히말라야 등반 40년 만에 8000m 신루트로 시샤팡마 정상에 선 박정헌 대원(위)과 강연룡 대원
5월 5일 오후 5시…정상에 서다

만약 더 늦으면 비박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소름이 끼쳤다. 8000m에서 비박한 산악인들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멈출 수가 없었다. 한 명이 멈추면 한국 최초 신루트 개척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등반을 시작한 그들은 어느 정도 설벽을 오르자 경사가 완만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약 30분 거리에 뾰족한 설벽의 끝이 보였다. 그곳보다 더 높은 곳은 없었다. 정상임을 바로 직감했다. 강연룡은 배낭에서 카메라와 캠코더를 꺼냈다. 5월 5일 한국시각 오후 5시 그들은 시샤팡마 정상에 섰다. 벅차오르는 감격을 뒤로 한 채 정상 등정의 증거가 되는 사진 촬영과 비디오 촬영을 시작했다. 약 30분 동안 촬영하며 머물렀다. 강연룡·박정헌은 한국인 최초로 8000m에 완전히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이 히말라야를 시작한 지 40년 만에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강연룡은 회상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다. 마지막으로 밀어붙인 것이 등정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정상에 섰을 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항상 등정하면 내려올 것을 걱정한다.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코리안 하이웨이(Korean Highway)’

그들은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하산을 시작했다. 15m짜리 로프로 서로를 묶고 생명을 서로에게 맡기면서…. 구름이 조금씩 시샤팡마 정상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오를 때 가장 힘들었던 록밴드 구간은 다행히 설치한 고정로프를 이용해 쉽게 내려왔다. 그러나 2캠프는 멀리 있었다. 하산을 시작한 지 4시간 만에 2캠프에 도착했다. 춥고 배고픈 저녁을 보낸 등정조는 오전 10시 하산을 시작했다. 해발 7000m에서 200m를 내려오는데 2시간 30분이 걸릴 정도로 하산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5월 6일 오후 7시 그들은 전진캠프에 도착하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지만 베이스캠프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이들은 오후 9시 드디어 대원들이 기다리던 베이스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박정헌·강연룡 대원은 한국인 최초로 새로운 루트로 8000m 봉우리를 등정했다. 한국도로공사는 이 루트를 ‘코리안 하이웨이(Korean Highway)’로 명명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베이스캠프에서 라마제를 지내고 기념촬영한 대원들과 현지인들.
취지문

다사다난했던 지난 2001년 한국 산악계에 던져진 가장 반가운 큰 소식- 그것은 한국산악운동 역사상 최초의 ‘한국도로공사의 산악실업팀’ 창단이었습니다.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의 도전- 예측 불허의 세계이며 무상의 행위인 산악등반의 특성상 실업팀의 탄생은 그 누구도 엄두를 못내던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산악팀을 출정케한 한국도로공사 오점록 사장님을 비롯한 도성환 노조위원장님, 그리고 도공 가족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첫 번째 도전.

히말라야 산맥의 험준하고 가파른 거봉 8000미터, 우리는 등반 루트를 티베트 히말라야의 전인미답 시샤팡마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로 하였습니다. 불굴의 의지와 단결력, 냉철한 판단력으로 슬기롭게 어려운 난관들을 극복하며, 강인한 체력과 일치단결한 팀워크로 우리나라 최초로 8000미터 거봉에서 코리안 하이웨이 신루트를 개척할 것입니다.

이번 시샤팡마 남벽 원정 등반은 우리 한국도로공사의 개척정신과 불굴의 도전정신의 표출이자 상징이며, 요 몇 년 사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에게 공기업의 윤리적 희망과 즐거움, 그리고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동안 우리 도로공사 산악실업팀 창단을 위해 힘찬 격려와 성원, 그리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한국도로공사 임직원 여러분들과 대한산악연맹 김상현 회장님을 비롯한 산악 선후배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이 훌륭한 선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끝으로 2002년 한국도로공사 시샤팡마 원정대의 등반이 순조롭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맺음합니다.

‘꿈을 밀고 나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가슴이다.’

2002년 3월 한국도로공사 시샤팡마원정대 대장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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