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7) 영호남 산악인, K2 남남동릉 한국 초등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7) 영호남 산악인, K2 남남동릉 한국 초등
  • 경남일보
  • 승인 2020.09.0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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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선 강연룡(오른쪽)과 주우평 대원.
새천년을 맞아 영호남 산악인들은 K2에 다시 도전했다. 이성원 원정대장을 중심으로 경남에서는 1999년 등반한 박정헌과 유순욱·윤치원·강연룡이 참여했다. 전남에서는 김병찬·김주형·문종국·이정현·윤중현·주우평 대원이 선발됐다. 대원 대부분 8000m 산을 등정하거나 등반한 경험이 있어 최고 클라이머들로 원정대를 구성, 막강한 등반력과 조직력을 갖췄다. 당시 K2는 3년간 단 한 명의 등정자도 허락하지 않으며 ‘하늘의 절대군주’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자존심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이 선택한 루트는 지난해 실패한 남남동릉이었다.
 
 
‘제비집’으로 명명한 1캠프에서 유순욱 대원이 고개를 내밀자 새 한마리가 머리위를 날고 있다.
절벽 아래 빙벽을 깎아 만든 ‘제비집’

5월 21일 발토르 빙하를 따라 1주일간의 카라반을 마치고 베이스캠프에 입성했다. 지난해 날씨가 가장 큰 변수인 것을 감안해 일찍 도착했다. 그러나 영하 17도로 떨어지는 추운 날씨에 대원들은 감기와 마른기침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해에 비해 적설량은 많지 않았지만 강한 바람과 폭설이 자주 내렸다. 5월 28일 첫 등반에 나서 이틀 만에 1캠프(6300m)를 건설했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1캠프는 절벽 바로 아래 빙벽을 2~3시간 깎아내 만들었다. 일명 ‘제비집’이었다. 1캠프를 만든 후 폭설이 잦아 2주간 등반을 못했다. 하지만 2~3일 날씨가 좋아지자 1000m 로프를 깔며 6월 13일 7000m에 2캠프를 만들었다. 6월 중순 외국 원정대가 들어오면서 활기를 띠었다. 지난해 실패한 이탈리아 한스 커머란더도 있었다. 한스는 노멀루트가 아닌 남남동릉으로 오르겠다며 로프를 사용하게 달라고 요청했다. 이성원 대장은 “대원들과 의논한 끝에 설치한 로프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산악인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대원들도 기꺼이 찬성해 소정의 사용료를 받고 허용했다”고 말했다.
한스 역시 “감사하다. 먼저 온 대원들이 로프를 깔아놓은 상황에서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은 ‘히말라야의 에티켓’이라며 흔쾌히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눈보라를 뚫고 등반하고 있는 대원들
최대 난제 3캠프 건설

이성원 대장은 K2 등정의 가장 큰 과제로 2~3캠프 구간으로 분석했다. “2캠프는 정상으로 가는 전진기지였다. 이곳에 3~4인용 텐트를 설치해 대원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했다. 2캠프까지 총 2700m의 고정 로프를 설치했고 추가로 1500m 이상의 로프를 깔아 3캠프를 설치하는 것이 이번 등반 승패를 좌우하는 최대 난제였다.”

박정헌 등반대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작년에 7600m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다. 2캠프에서 3캠프까지 800m 구간에 있는 많은 눈이 있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식량과 장비를 수송하는 것이 정상 공격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틀간 2개 조로 나눠 필사적으로 3캠프 건설에 나섰지만 7500m 지점에서 돌아서야 했다. 안타깝게도 하산 후 2~3일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밤이면 바람 한 점 없이 수많은 별이 반짝였다. 마치 시샘이라도 하듯….

화장실도 로프 매고 가야

6월 19일 2조 김병찬·김주형·윤치원·이정현·유순욱은 2캠프로 진출해 3캠프를 연결하는 로프 설치 작업에 나섰다. 아쉽게도 그들은 1캠프에 고립되고 말았다. 50㎝가 넘는 폭설이 내려 좁은 텐트에서 5명이 2박 3일을 견뎌야 했다. 절벽을 깎아 만든 1캠프는 ‘제비집’이라 불렀다. 바위 절벽 아래 얼음을 깎아 만든 1캠프는 화장실을 갈 때도 안전벨트를 매야 할 정도였다. 이정현 대원은 말했다. “등반하는 것도 힘들지만 좁은 텐트에서 지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화장실 가는 것도 위험해 포기하고 참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등반에 지친 것이 아니라 텐트 생활이 힘든 72시간이었다. 기상이 좋아지자 2캠프로 가는 대원들은 많은 눈으로 인해 2시간이 더 걸렸다. 3캠프 건설을 위해 새벽 5시 텐트를 나섰지만 무릎 이상 빠지는 눈이 전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80m를 오르고 후퇴했다. 대원들은 기진맥진했다. 유순욱은 말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무릎까지 왔다. 눈이 얼지 않아 밟으면 푹 내려갈 정도였다. 눈을 헤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흙으로 된 뻘을 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힘들었다.”

 
직벽에 가까운 암벽 구간을 오르는 대원들
“산소를 사용하더라도 3캠프를 만들어라”

이성원 대장은 특명을 내렸다. “산소를 사용하더라도 3캠프를 반드시 설치해라! 3캠프를 건설해야 정상으로 가는 루트를 확보할 수 있다.”

6월 24일 1조 강연룡·문종국·박정헌·윤중현·주우평 대원이 1캠프를 거쳐 2캠프로 향했다. 당초 3캠프가 만들어지면 곧바로 정상 공격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3캠프 건설이 무산되면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6월 25일 새벽 4시 30분 2캠프를 나선 대원들은 예상보다 빨리 2조가 마지막으로 진출한 지점에 무사히 도착했다. 눈이 잘 얼어 등반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들은 고도를 높여갔다. 파키스탄 카라코람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발아래 펼쳐졌다. 희박한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며 심장 박동은 빨라졌다. 발걸음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8000m에 다가갈수록 기온은 급격하게 올라갔다. 이제 더위가 그들을 괴롭혔다. 40도에 육박하는 기온은 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얼어붙었던 눈이 급격하게 녹기 시작했다. 눈이 많은 곳은 허리까지 빠졌다. 1시간 넘게 눈 속을 허우적거렸지만 10m도 채 나아가지 못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대원들은 휴식을 취했다. 박정헌 등반대장은 등반 루트를 변경하기로 했다. “기존 남남동릉 루트는 눈이 너무 많아 전진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시간과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대원들은 체력적으로 큰 부담을 느껴 등정은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바위가 많은 구간으로 루트를 바꿨다.”

 
3캠프로 가는 김주형 대원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3캠프에서 바라본 카라코롬 연봉들. 가운데 솟아있는 산은 초골리사(7665m)
등반 12시간 만에 전초기지 구축

그러나 암벽에도 눈이 쌓여있어 위험했다. 대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만약 중심을 잃는다면 큰 위험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너 발짝 움직이고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코와 입을 최대한 벌려 가쁜 숨을 내쉬고 산소를 최대한 들여 마셨다. 대원들의 시야에 주변에 있는 브로드피크(8047m) 정상 부근이 들어왔다. 이번 등반의 최대 고비인 3캠프에 가까이 올라왔음을 알았다. 대원들은 희박한 산소와 무거운 배낭으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배낭에는 정상에 갈 때 사용할 산소통 2개와 로프, 개인 장비 등 10㎏가 넘었다. 8000m 이상에서 느끼는 무게감은 평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대원들은 1500m의 로프를 깔며 거의 12시간 만에 해발 7900m 숄더 부분에 도착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대원들은 3캠프를 설치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과 함께 추위가 엄습했다. 대원들은 급히 텐트로 몸을 숨겼다. 눈을 녹여 땅콩과 잣 등이 들어 있는 차로 저녁을 해결했다.

가자 8611m…정상으로

6월 26일 새벽 1시. 4명의 대원들은 하나둘 지친 몸을 침낭에서 겨우 빼냈다. 이제 마지막 등반이 남아 있었다. 텐트를 떠나는 순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채 10시간 이상을 올라가야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계속 걸어야 한다. 만약 걷지 않으면 곧바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또 정상에 서더라도 그들은 ‘죽음의 하산’을 시작해야 한다. K2는 등정 후 하산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악명이 높다. 세상에서 가장 험한 산을 올랐다는 기쁨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무릎 쓰고 내려와야 한다. 힘들게 일어난 대원들은 산소통에 레귤레이터를 조립하고 텐트를 나섰다. 가장 막내 주우평 대원이 선발로 나섰다. 무산소로 등반에 나선 박정헌은 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새벽이라 눈은 잘 얼어 있었고 아이젠이 잘 먹혔다. ‘뿌드득’하는 발자국 소리와 산소통을 통해 흘러나오는 거친 소리만이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거대한 계곡이 합쳐지는 병목지대인 8050m를 넘어서자 하얀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자 대원들은 K2의 윗부분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높이 200m가 넘는 거대한 얼음탑이었다. 경사가 점점 심해졌고 가랑눈이 쌓인 지대가 나타나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강연룡 대원이 선두로 나섰다. 그는 경사가 심한 빙벽을 선등하고 확보했다. 다른 대원들은 주마(JUMAR 등강기: 산을 오를 때 로프에 끼워 사용하는 장비)를 이용해 대빙탑을 왼쪽으로 돌아서 올라갔다. 이번에는 약 300m의 설벽이 나타났다. 박정헌은 회상했다. “눈의 상태가 좋지 않아 등반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설벽에서 2개의 루트가 있었는데 우리는 오른쪽 대빙탑 위를 올라 처음 정상으로 보이는 사면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상직전

1차 4명·2차 4명…정상에서 감격의 포옹

그들의 선택은 정확했다. 대빙탑을 돌파하자 둥근 봉우리가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것 같은 정상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K2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연룡 대원이 앞장서서 길을 개척했다. 정상이 점점 다가왔다. 6월 26일 오후 3시. 대원들은 정상에 올랐다. 8000m 14좌 가운데 가장 어렵다는 K2에 그들은 서 있었다. 한국 최초로 남남동릉 루트를 통해 등정한 것이다. 산소를 사용한 윤중현·강연룡·주우평 대원은 정상에서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이어 박정헌은 무산소로 등정, 한국 최초 무산소 등정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기념사진을 마치고 마음껏 기쁨을 누렸다.

주우평 대원은 회상했다. “1999년 가셔브롬1봉을 등정하고 두 번째 오른 K2는 높이와 난이도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너무나 큰 산이었다. 25살에 오른 K2야말로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본판용-강연룡 대원(앞쪽)이 등반 도중 정상으로 가는 루트를 살펴보고 있다.
K2는 등정 후 하산하다 사망률이 가장 높은 산이다. 말 그대로 하산 길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속담을 떠올릴 정도였다. 4시간 만에 무사히 3캠프로 하산했다. 6월 29일 2차 공격조가 정상을 향했다. 김주형·이정현·유순욱·윤치원 대원은 1차 공격조가 설치한 고정 로프와 발자국을 따라 10시간 만에 정상에 섰다. 6월 29일 오전 7시 50분이었다. 쉽게 정상에 오른 대원은 하산길에 복병을 만났다. 강한 바람과 폭풍이 몰아쳤다. 하산을 시작한 지 7시간이 지났지만 대원들은 3캠프에 도착하지 못했다. 더욱 긴장시킨 것은 통신 두절이었다. 이성원 대장은 애타게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설마 K2의 살인적 강풍에 사라진 것이 아닌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K2로 몰려온 먹구름은 대원들이 하산하는 길목인 8000미터 지점까지 몰려왔다. 결국 2차 공격조는 화이트 아웃에 걸려 3시간 이상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화이트 아웃으로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앞서 내려간 대원들의 발자국이 금방 사라지고 모습도 보이지 않아 고함을 지르며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정상에서 소식을 보내온 지 9시간 만인 오후 5시께 안도의 무전이 날아들었다. 유순욱 대원이 베이스캠프와 통신했다. “기상악화로 앞을 구별할 수 없어 3캠프를 찾지 못하다가 겨우 찾았다. 대원들은 모두 무사하다.”

 

2000년 K2 원정 취지문

K2, 그 이름에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K2, 8,611m

하늘 위헤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를 보는 순간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힘을 느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을 메웠고 햇볕속에 빛나는 하얀 벽은 눈이 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그 후로 저는 K2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려고, 때로는 차라리 잊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롱한 모습으로 K2는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알피니즘으로 설명하기 힘든 K2의 매력은 차라리 운명적이며 숙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정성스런 마음으로 짐을 꾸립니다. 발토르 빙하 깊숙한 곳에서 아버지처럼 근엄하고 어머니처럼 자상한 모습의 K2에게 순례자의 마음으로 다가가려 합니다.
최선을 다한 준비와 등반을 통해 삶의 의미와 열정을 K2의 정상에 우뚝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K2라는 이름 속에는 그 무엇인가가 있듯이 우리 모두의 삶에도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고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0.4

2000한국K2원정대 대장 이성원


1986년 이후 14년 만에 등정

이 원정은 두 번의 정상 공격을 모두 성공으로 이어졌으며 K2 등반 사상 한 팀에서 8명이라는 세계 최다 등정자 기록을 세웠다. 또 남남동릉 한국 초등에 이어 세계 4번째 등정, 박정헌은 한국인 최초 무산소로 올랐다. 특히 1986년 이후 한국이 14년 만에 재등이라는 굵직굵직한 등반기록을 남겼다. 윤치원과 강연룡은 1999년 가셔브롬4봉 북서릉 세계 두 번째 등정에 이어 K2 남남동릉을 통해 등정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정현은 1995년 7월 12일 브로드피크 등정에 이어 1999년 가셔브롬1봉 등정, 그리고 K2를 등정하면서 파키스탄 카라코람 4개봉 가운데 3개봉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정현은 말했다. “브로드피크 등정 이후 K2를 볼 때마다 참 멋진 산이다. 언젠가는 꼭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운 좋게 세 번 만에 그 꿈이 이루어졌다.”

이성원 원정대장은 “영호남을 대표하는 산악인들이 모두 참가한 만큼 등반 능력도 뛰어났고 대원들간의 융화가 잘 됐다. 남남동릉 루트는 한국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이었지만 1차에 4명, 2차에 4명 등 모두 8명이 올랐다. 국내에서는 1986년 이후 14년 만에 등정하는 대기록을, 1996년 이후 K2 등정자가 없었는데 이 기록 역시 2000년 영호남 산악인들이 갈아치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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