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4) 난공불락 G4,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르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4) 난공불락 G4,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르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8.1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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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가셔브롬4봉 원정대, 윤치원·강연룡 등정
대원 13명 3년간 훈련·눈물 끝 이룬 ‘쾌거’
베이스캠프에 모인 대원들과 현지인들.
“가셔브롬4봉(G4) 등정은 대한민국이 세계 거벽 등반사에 한 획을 긋는 의미 있는 등반이었다.”-김재수 원정대장.

1999년 7월 1일 오후 4시 15분 윤치원과 강연룡은 G4 북서릉~북봉~북동릉을 거쳐 해발 7925m 정상에 섰다. 이 등정은 1986년 미국·호주합동대 세계 초등 이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룬 쾌거였다. 경남산악연맹은 G4 등정으로 한국 산악계는 물론 세계 산악계에 등반력을 과시했다. 이 루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3등이 나오지 않는 철옹성 그 자체다.

8000m급 4개봉 원정…IMF로 무산

경남산악연맹은 1997년 1월 회의를 개최하고 파키스탄에 있는 K2(8611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롬2(8035m), 가셔브롬4봉(7925m) 등 4개 산을 동시에 등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8000m 1개를 등반하기 위해서는 1년이 넘는 훈련과 대원 선발, 그리고 1억 원에 가까운 원정 경비를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4개 봉우리를 한꺼번에 오른다는 것은 세계 어느 산악인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날 회의에서 8000m 4개봉 원정 계획을 수립하고 김관준 총대장, 조형규 대장이 총괄 지휘하고 부대장에 이병갑·신영호·신영철·최재일을 선임했다. K2는 김인태 대장과 15명이, 브로드피크는 박주환 대장과 12명, 가셔브롬2봉은 이상배 대장 등 11명, 가셔브롬4봉은 김재수 대장 외 9명으로 구성했다. 원정대는 2년 가까이 지리산과 한라산, 설악산, 영남알프스 등을 누비며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IMF 영향으로 대규모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경비 마련이 어려워지면서 원정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카라반 및 등반루트

가셔브롬4봉 원정대…열악한 환경 딛고 도전장

그러나 가셔브롬4봉 원정대는 김재수 대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그들은 개인 호주머니를 털고 건강식품을 팔며 원정 경비를 마련했다. 대원들은 주말과 휴일이면 모여 강도 높은 훈련을 이어갔다.

김재수 대장은 회상했다. “4개봉 원정이 무산됐다. 그러나 G4 원정대는 해체하지 않고 원정을 가기로 결정했다. 대원들은 사비로 원정 경비와 훈련 경비를 마련했다. 정말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지인으로부터 원가로 지원받은 건강보조식품을 팔며 부족한 경비를 마련했다. 3년이 넘는 훈련을 마치고 1999년 꿈에도 그리던 파키스탄으로 떠날 수 있었다.”

1999년 봄 마지막 훈련에서 조민기 대원이 암벽 훈련을 하다 추락하면서 중상을 입는 불행까지 겹쳤다. 하지만 대원들은 병원에서 교대로 조민기 대원의 대소변을 받아냈고, 병원비를 십시일반으로 부담하는 진한 산악인의 우정을 보여줬다.

우여곡절 끝에 경남산악연맹 가셔브롬4봉 원정대(원정대장 김재수)는 5월 8일 출국했다. 선발대로 먼저 도착했던 강연룡 대원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행정처리를 마무리했고 본대를 맞이했다. 원정대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식량 및 장비를 구입하고 5월 12일 스카르두로 이동했다. 그러나 스카르두~아스콜리를 잇는 도로가 폭우로 인해 유실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결국 짚 카라반 최종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통갈’이라는 마을에서 상행 카라반을 시작했다. 카라반 6일 만인 5월 22일 해발 49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서동호 대원이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지만 다행히 큰 부상 없이 구조되기도 했다.

 
G4 원정대 베이스캠프 전경
원정대원

 

하루 12시간 이상 루트 개척·짐 수송

원정대는 전진캠프(ABC)를 설치하고 루트를 정찰하기 위해 4인 1조로 운행하기로 했다. 1조는 김영태 등반대장·김성상·김성철·강연룡 대원이, 2조는 김용군·정일웅·서동호·윤치원 대원이 2조로 결정됐다. ABC~1캠프(5400m)는 눈이 많아 진출에 어려움이 많아 3일간 루트 작업 끝에 5월 27일 플라토 위에 텐트를 설치했다. 2조는 2캠프(6400m) 건설 작업에 나섰다. 1조 대원들은 하산해 휴식을 취한 후 1캠프로 식량과 장비를 옮겼다. 김영태 등반대장은 루트 개척과 짐 수송에 솔선수범하며 대원들을 격려했다. 당초 2캠프는 2일 정도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4일이 꼬박 걸린 6월 3일 설치했다. 2캠프로 가는 길은 약 1000m에 달하는 설벽과 청빙으로 계속 이어져 강한 체력과 인내심을 요구할 정도로 어려운 구간이었다. 대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루트를 만들고 짐을 수송하느라 파김치가 됐다. 이틀간 내린 폭설로 대원들은 베이스캠프에서 지친 체력을 회복하며 휴식을 취했다.

6월 7일 등반을 재개한 원정대는 김영태 등반대장과 김성상·김성철·강연룡 대원은 3캠프(6800m)까지 진출했다. 다음날 티베트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과 눈이 내리자 등반을 멈추고 하산했다. 계속되는 기상악화로 대원들은 베이스캠프로 철수했으며 3일간의 달콤한 휴식 시간을 보냈다.

대원들이 설사면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공격조·지원조 나눠 등반…성공률 높여

6월 15일 1조는 3캠프에 도착해 설사면을 2시간 넘게 깎아 텐트를 설치했다. 이틀간 날씨가 나빠 대기하던 대원들은 날씨가 좋아지자 4캠프(7400m) 루트작업에 나섰다. 김영태 등반대장은 다음날도 앞장서 루트 개척에 나서면서 체력 소모가 많아졌다. 결국 그는 베이스캠프로 하산하고 윤치원·강연룡 대원이 300m에 달하는 고정로프를 깔고 하산했다.

김재수 대장은 베이스캠프에 전 대원들에게 등정 계획을 발표했다. “등반대장을 비롯한 전 대원들이 최선을 다해 4캠프까지 진출했다. 워낙 힘든 산이라 지원조와 공격조가 분명해야 성공 확률이 높다. 선발대가 짐을 수송하고 길을 만들면 6명의 공격조가 정상으로 향할 것이다.”

6월 22일 김재수 대장의 명령에 따라 정일웅·김용군·서동호·박진옥 대원은 1캠프로 물량을 수송했다. 많은 눈으로 쌓인 루트를 새롭게 다지며 전진했다. 6월 24일 김영태 등반대장·김성상·김성철·윤치원·한정훈·강연룡 등 공격조 6명이 뒤를 따랐다.

지원조 무너진 텐트 보수…눈물겨운 사투

선발대가 폭설로 무너진 3캠프를 보수하는 동안 공격조가 도착했다. 대원들은 힘을 합쳐 텐트를 복구했다. 6월 26일 공격조가 4캠프(7400m)를 설치하는 동안 지원조는 2·3캠프에서 대기했다. 다음 날 김영태 등반대장과 공격조가 크레바스를 조심스럽게 통과하고 경사가 심한 설벽을 어렵게 통과하며 5캠프(7800m)까지 진출한 후 후퇴했다.

6월 28일 새벽 4시 정상 공격을 위해 대원들이 4캠프를 떠나 북봉(7913m)으로 향했다. 힘겹게 북봉 아래 도착했지만 곧바로 넘기에는 위험할 것 같아 망설였다.

김영태 등반대장은 말했다. “북봉 밑에 도착하자 대원들이 북봉을 바로 넘을 것인지, 돌아서 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북봉은 암질이 단단해 하켄이 잘 먹히지 않아 확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강연룡·윤치원 대원이 선등하며 하켄을 박았지만 안전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오후 들면서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암벽에 매달려 로프를 고정하는 일이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은 모두 4캠프로 철수했다. 6월 29일 정일웅·윤치원·강연룡 대원은 가스와 텐트 1동, 식량을 조금 챙겨 출발했다. 약 250m의 고정로프를 설치하며 전진을 계속한 끝에 5캠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틀간 휴식을 취한 것이 체력 회복에 도움을 줬고 등반 속도도 생각보다 빨랐다.

 
루트를 만들며 전진하고 있는 윤치원
윤치원 “결혼한 사람은 내려가라!”

5캠프에서 정상까지 표고 차는 불과 125m였다. 그들은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강한 자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1986년 처음으로 등정한 이후 제2등이 나오지 않는 가셔브롬4봉의 가장 난코스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3명의 대원은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윤치원이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가셔브롬4봉 정상에 서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내려오는 것이다. 칼날 능선에서 자칫 잘못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우리는 결혼을 안했으니 죽어도 괜찮다. 하지만 일웅이 형은 결혼했잖아요. 결혼한 사람은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어요?”

7월 1일 12시 해발 7800m 5캠프. 강연룡 대원은 눈을 떴다. 무전으로 베이스캠프를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정상 공격을 위해 베이스캠프를 떠나온 지 벌써 8일째였다. 강연룡은 어쨌든 이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2시 그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 대원들을 깨웠다. 스프로 간단히 아침을 먹은 3명은 장비를 챙겼다. 텐트 밖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하면서 손이 얼어 감각이 없었다. 다시 텐트로 들어온 그들은 버너에 손을 녹였다.

마음을 결정한 3명은 드디어 정상으로 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5분 정도 선두에서 가던 강연룡이 돌아서며 말했다. “일웅이 형님. 그냥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연룡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정일웅은 아무런 답을 못했다. 옆에 있던 윤치원이 거들었다. “형님은 결혼했으니까 형수님도 있고 하니 그냥 내려 가이소.”

윤치원·강연룡 대원보다 2일 먼저 올라온 정일웅 대원은 사실 체력 소모가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2명의 권유에 정일웅은 하산했다.

 
지옥으로 가는 낭떠러지. 가셔브롬4봉 정상으로 가는 길. 아래쪽에 로프가 보이고 윤치원 대원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윤치원·강연룡 칼날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남은 윤치원과 강연룡은 이틀 전 설치한 고정로프를 이용해 북봉 아래까지 진출했다. 약 400m 정도 돌아가자 거대한 쿨르와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이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 많은 체력과 시간을 낭비했다. 9시간의 등반 끝에 낮 12시 가셔브롬 4봉 전위봉에 올라섰다. 드디어 정상으로 가는 9부 능선을 넘었다. 전위봉에서 아이스바일로 자일을 고정한 후 정상부로 연결되는 설원으로 나아갔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온통 바위 돌출부가 톱날처럼 늘어서 있었다. 잘못하면 수천m를 추락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구간이었다. 윤치원·강연룡은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사면 능선에 60m의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남은 자일로 100여m를 전진한 후 정상에 섰다.

세계 2등 영광…어둠 속 위험한 하산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13시간여 만인 7월 1일 오후 4시 15분이었다. 1986년 호주·미국합동대 그렉 차일드·팀 매카트니·톰 하기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북서 루트를 통해 정상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정상은 2명이 서기에는 너무 좁았다. 강연룡 대원은 약간 위에, 윤치원 대원은 바로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서로 등정을 축하했다. 가스가 많아 정상에서 파노라마는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 사진을 한 장씩 찍고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하면서 그렉 차일드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캘리포니아 카라비너 2개를 회수했다. 오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에서 5캠프 전 구간에 로프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6월 30일이 보름이었지만 구름이 많이 끼면서 달빛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고정로프가 없는 구간에는 서로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랜턴도 없어 하산은 늦어졌다. 그날 밤 9시 50분 5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7월 2일 3캠프를 거쳐 베이스캠프에 돌아와 대원들과 감격의 포옹을 했다. 윤치원은 등정 기념으로 그렉 차일드가 사용한 카라비너 2개를 선물로 건넸다. 당시 나는 K2에서 무전기로 G4 등정 소식을 들었다. 다음 날 나는 등정을 축하하기 위해 가셔브롬4봉을 찾았다. 내 배낭에는 대원들이 가장 원하는 소주가 들어 있었다. 힘겹게 도착한 베이스캠프에서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3년간 흘린 대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

김재수 대장은 등정 의미를 부여했다.
“대원 모두가 헌신적으로 노력해 이룩한 등정이었다. 특히 김영태의 체력과 판단력, 강연룡 기술, 윤치원의 인내력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 가능했다. 김영태가 솔선수범해 루트를 개척했고 마지막 캠프에서 후배에게 등정을 양보했다. 그는 하산하면서 무전기를 껐다.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렇게 했다. 7900m에서 80도 경사의 암벽이 나온다. 가장 힘든 구간이다. 우리는 지난 3년간 이 구간을 염두에 두고 훈련했다. 한여름에도 고소화를 신고 훈련할 정도로 등반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윤치원은 당시 이렇게 회상했다. “가셔브롬4봉 등정은 2명이 해낸 것이 아니다. 대원 모두가 노력한 결과물이다. 전 구간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선 김영태 등반대장, 캠프로 식량과 장비를 옮긴 대원들, 등반하며 음식을 만든 대원들 등 모두가 함께 이뤄냈다. 노력한 대원들에 비해 단 2명밖에 오르지 못하고 좀 더 많은 대원이 정상에 서지 못해 미안할 뿐이다.”

강연룡은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까지 24시간을 계속 등반했다.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해야 했다. 한눈을 파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되면서 생리적 현상마저 멈추고 말았다. 내 등반에서 가장 짜릿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취지문 칠백 팔십일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의 땀으로 이제 꽃망울을 피우려 합니다. 설레임으로 시작하여 좌절과 고통의 상념 속에서 우리 모두는 인내를 배웠습니다. 사람과 사람들의 미움과 갈등을 산인의 미소와 여유로 묻어 두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로고져 하는 산 정상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믿음의 결속이었습니다. 굉음이 질주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하얀 설화가 만발한 산능선 위에서 수많은 생각과 갈등을 날려 보내고 하나를 위해 둘 또는 셋을 포기해야만 하는 숨가쁜 현실을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 대원 모두는 자연의 품속에서 힘찬 정열과 결속을 바탕으로 피보다 진한 감동과 우정을 체감하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성숙된 모습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한 부분을 위해 ‘최선’이라는 낱말을 감히 적어봅니다. 1999년 4월 24일 원정대장 김재수


가셔브롬4봉 등반사(1958~1999)

파키스탄 카라코롬 가셔브롬 산군에 속한 가셔브롬4봉은 높이 7925미터로 8000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산이다. 산군 1봉에서 5봉까지 반시계 방향으로 위치해 있으며 1봉과 2봉을 제외하고는 모두 7000미터 봉우리들이다.

가셔브롬4봉은 1934년 다이렌 퍼스와 마틴 콘웨이가 베이스캠프까지 접근했다. 24년이 지난 1958년 리카르도 카신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가 북동릉을 통해 초등했다.

이 원정대는 6개의 캠프를 설치하고 4개의 설벽을 넘어섰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리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8월 4일 몬순이 끝난 후 해발 7350미터 리지에 불안하게 설치된 6캠프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윌터 보나티와 카를로 마우리는 침착하게 어려운 구간들을 모두 돌파했다. 다음날 아침 7시30분 등반을 재개한 이들은 마지막 300미터 높이의 위협적인 릿지를 거쳐 정상에 올랐다.

당시 보나티는 “자신의 등반 인생 중 가장 끔찍했던 시간이었다”고 기술했다.

1986년 그렉 차일드와 제프 레드포드를 주축으로 하는 미국과 호스트레일리아 합동대가 북서릉 루트를 초등했다.

가셔브롬4봉에 한국인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것은 1995년이었다. 한국산악회 조성대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가 북서릉을 경유해 7800미터까지 진출했지만 대원 한 명이 동상을 입고 되돌아섰다.

다음해인 1996년 서울시립대(대장 이동훈) 원정대가 동벽으로 시도했지만 7200미터까지 진출하는데 그쳤다.

1997년 한국산악회가 원정대를 꾸려 서벽 중앙립을 돌파, 정상에 서는데 성공했다. 유학재, 방정호, 김동원 대원은 3캠프(6800m)를 출발해 두 번의 비박을 하면서 서벽 중앙립 루트를 초등했다.

1999년까지 가셔브롬4봉에 세계 각국의 많은 원정대가 도전했지만 현재 3개 원정대만이 정상에 올랐을 뿐 루트 재등이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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