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묻다 [9] 산청시대(1)
남명에게 묻다 [9] 산청시대(1)
  • 임명진
  • 승인 2019.12.0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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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지리산에 정착하다
지리산을 너무나 사랑한 남명
천왕봉이 훤히 보이는 곳에 정착

‘봄 산 어느 곳인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만
다만 하늘 가까이 닿은 천왕봉 마음에 드네

빈손으로 들어와서 무엇을 먹고 살 건가
십리에 뻗는 은하수 같은 물 먹고도 남겠네’

-남명집 중 ‘덕산에 자리잡아 살면서’
 

산천재에 견학 온 초등학생들을 문화관광해설사가 안내하고 있다.


남명은 지리산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의 눈에 지금의 산청 덕산이 들어왔다. 명종 재위 16년이 되던 해인 1561년 남명은 지리산 아래 덕산 사륜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해 산해정을 떠나 고향 삼가로 돌아온 지 12년만의 일이다.

남명은 덕산에서 산천재를 짓고 자신과 제자들의 거처와 강학장소로 삼았다. 산천재는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이 훤히 보이고, 그곳에서 발원한 물이 중산과 삼장으로 흐르다가 양당에서 합쳐 덕천을 이루면서 아담한 들판을 여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남명은 평생 갈고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말년에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할 새로운 거처를 찾기 위해서 남명은 직접 덕산 골짜기에 3번, 청학동, 신응동 골짜기에 한 번, 용유동 골짜기에 3번, 백운동 골짜기에 한번, 장항동 골짜기에 한 번 등 모두 10여 차례 지리산을 찾을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허권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옛 선비들은 자연을 인격적으로 대접했다. 물은 늘 쉬지 않고 흐르고 지형에 따라 낮은 곳을 찾아가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의 변화와 적응력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산은 늘 장중하므로 어진 사람은 산의 장중한 모습을 배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인격수양에 산수가 많은 영향을 미쳐 사는 곳을 정할 때도 지형의 여러 요소를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남명의 지리산 사랑은 그가 직접 지은 ‘두류산 유람록’에서 드러난다. 그의 나이 58세가 되던 1558년(명종 13년) 진주목사 김홍, 자형인 이공량, 황강 이희안, 구암 이정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다. 그의 지리산 방문은 그 자체로 일대에서 큰 화제가 될 정도였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남명이 당시 합천 삼가에서 하동 쌍계사 방향으로 떠난 지리산 유람은 처음에는 벗들과 함께 단출한 규모였지만 남명을 따르는 이들이 도중에 합류하면서 그 행렬이 수십여 명으로 불어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남명을 보려고 지방관이나 선비들이 마중을 나왔으니 당시 남명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명기념관에서 시민들이 남명의 무진봉사가 새겨진 기념비를 둘러보고 있다.


‘높은 산과 큰 내를 보며 소득이 없지 않았다. 더구나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주어 본다면 10층의 산봉우리 위에 다시 옥돌 한 층을 더 얹어놓은 격이요. 천 이랑 물결 위에 둥그런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라 하겠다.

바다와 산을 거치는 300여 리 여정 동안에 세 군자의 자취를 하루 사이에 보았고, 산수를 구경하다가 다시 훌륭한 인물을 보게 되었다’-남명집


남명은 유람 중에 보고 겪은 일마다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또 보니 산 속 바위에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새겨둔 것이 많았으나 세 군자의 이름은 결코 바위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장차 그들의 이름에는 반드시 오래도록 세상에 퍼져 전해질 것이니 만고의 역사를 바위로 여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겠다’-남명집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 훌륭하게 일생을 살았으면 사관이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고, 만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게 날다람쥐나 살쾡이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다 이름을 새겨놓고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새의 그림자를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무슨 새인지 알아맞히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다.’- 남명록 수록

예나 지금이나 이름 있는 명승지 마다 낙서행위는 골칫거리 이었는가 보다. 이 구절은 남명은 지리산을 유람하던 중 길가의 큰 바위마다 자연을 훼손해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보고 개탄하면서 남긴 글이다.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 놓으면 그것이 천 년, 만 년 전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남명은 이를 어리석은 짓으로 치부했다.

허권수 명예교수는 “남명에게 지리산은 단순한 유람이 아닌 사물의 철학과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 가치 있는 공부의 한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남명이 쓴 두류산 유람록을 본 퇴계는 이렇게 평했다.

‘남명의 유람록은 유람하고 구경하는 것 외에 일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하니 그 사람됨을 상상하도록 한다.
곡식을 키우는 데 있어 하루 따뜻하게 해 주고 열흘 한 기운을 쐰다면 아무런 도움이 없다. 공부도 조금 하다가 말다가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위로 올라가는 것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한 발짝 옮기는 데 달려 있다는 등의 말은 대단한 의미가 담겨 있다’ -퇴계집


산천재의 마당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바로 지척이다.

남명은 그런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남다른 감정을 내비쳤다. 장엄한 천왕봉의 기상과 산천재 앞에 흐르는 덕천강의 맑은 물, 자연을 한낮 풍경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남명이 이토록 지리산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승필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선생은 천왕봉을 자기화 했다. 하늘과 인간, 남명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의미가 바로 천왕봉이다. 아무리 시류에 권력이 흔들어도 꿋꿋한 천왕봉처럼 선비의 기상을 지키는 자기 정신의 정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선생은 평생 동안 한 번도 소신과 신념이 흔들림 없이 지켜낸 분이다. 산천재는 하늘을 지향하는 남명의 큰 정신을 담고 있다. 산천재에 남아 있는 여러 시에서도 선생의 그런 굳건한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설명했다.

남명의 나이 어느새 회갑을 맞이했다. 찾아오는 제자의 수도 갈수록 더 많아졌다. 이때 덕산으로 찾아온 후학들의 면면을 보면 임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종도, 이정, 김면, 이천경 등이 있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선생이 덕산으로 거처를 이주하자 머나먼 지리산까지 당대 쟁쟁한 가문에서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선생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특유의 기상과 학풍이 있었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병조판서를 지내며 유성룡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약포 정탁도 이 시기에 덕산을 찾았다.

정탁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오래전 벼슬에 나아가 진주 향교의 교수로 부임하면서 당시 유학의 거두인 남명에게 인사차 들른 것이다.

정탁은 진주에 근무하는 2년 동안 남명과 교류하며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일화가 있다. 정탁이 임기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러 오자 남명은 “자네는 말이나 행동이 너무 민첩하니 늘 소를 타고 가는 듯이 행동을 느리고 신중하게 처신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정탁은 이날 큰 깨우침을 받았던 듯싶다. 정탁은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50여 년 가까이 벼슬을 하면서 큰 허물없이 조정에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남명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말했다.



[남명을 알리는 사람들] 변명섭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

 
변명섭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


“남명의 재조명은 시대적 요청”

변명섭(65)씨는 산청군에 있는 남명기념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원래 타지에 살았던 그는 50대 초반의 나이에 우연히 천왕봉에 올랐다가 남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남명이 남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려운 상황에 있던 그에게 절망 속에서 발견한 한줄기 빛과 같이 이상하리만치 힘이 되어주곤 했다고 한다.

이후 남명 선생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고, 10여 년 전에는 아예 산청에 내려와 3년 전부터는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남명 선생을 알아야 하는 이유로 “시대의 정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도덕적 해이와 동시에 돈이 전부라는 황금만능주의가 사회전반에 퍼져 있는데, 남명의 정신은 인간의 양심복원에 큰 지렛대가 된다는 것이다.

남명기념관을 찾는 방문객의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일반시민부터 최근에는 선비문화연구원을 찾는 공무원 연수자들도 많이 찾고 있다.

변 해설사는 “남명선생의 경의사상과 그가 삶에서 몸소 실천했던 지행합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면서 “집단이기주의, 개인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사회의 둘도 없는 처방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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