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묻다 [5] 김해시대(2)
남명에게 묻다 [5] 김해시대(2)
  • 임명진
  • 승인 2019.11.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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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 핀 의지
‘말은 떳떳하고 미덥게 행동은 떳떳하고 신중하게
사악한 것 막아야 하고 정성스러움 간직해야 하네
산악처럼 우뚝하게 연못처럼 깊게 하면
찬란히 봄꽃처럼 피어나고 피어나리라’-(좌우명, 남명집 수록)



남명은 평생을 방울과 검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방울은 ‘성성자’라고 해서 자신의 마음을 깨우는 ‘경(敬)’의 도구로, ‘경의검’은 사사로움을 베어버리는 ‘의(義)’의 도구로 삼았다.

‘경의(敬義)’는 남명사상의 핵심이다. 남명은 위의 ‘좌우명’이라는 글을 통해 선비로서 지조를 지키며 불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직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열린 학문, 남다른 포부

남명(南冥)이라는 호는 남쪽에 있는 큰 바다를 뜻하는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말이다. 큰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남쪽에 있는 큰 바다로 날아가려고 한다는 뜻으로 웅대한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김해라는 지역적 의미가 남쪽 바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당시 그가 김해로 내려가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직접 지은 남명이라는 호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안승필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장자의 소요유편에 보면 북면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침잠기를 거쳐서 때가 되면 물고기 곤이 붕이라는 새로 변한다. 이 붕이라는 새가 천리되는 상공을 날아서 큰 날개를 퍼덕이면서 날아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남명, 남쪽바다인데, 선생이 지향하고자 했던 정신세계는 끊임없는 바다를 지향하는 큰 의미가 함축돼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명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당시 퇴계선생이 순수 주자학자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가고 있었다면 남명선생은 학문의 방향이나 받아들였던 여러 학문의 자세를 보면 필요한 학문이라면 장자와 노자, 불교 등을 모두 수용하는 열린 자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남명이 오늘날 다양화된 우리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남명이 김해와 합천, 산청을 오가며 지역마다 그가 지은 김해 산해정, 합천 뇌룡정, 계부당, 산청 산천재 건물에 붙인 이름에서도 장자와 노장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다른 학자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뇌룡정도 장자에서 따온 말이다.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는 뜻이다.

북면에 곤이 한없는 침잠기를 거쳐야 붕이라는 새로 발돋움 할 수 있는데 이를 수양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한없는 수양이 함축되어야만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천재도 산이 하늘을 품었다는 뜻인다. 하늘을 지향하는 남명의 큰 정신을 알 수 있다. 남명이 그토록 사랑했던 천왕봉은 하늘과 인간, 남명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해석할 수 있다.

안 해설사는 “선생은 가는 곳마다 지었던 건물의 이름만 봐도 지향했던 포부가 컸던 대장부라고 생각한다. 글을 읽을 때마다 굵은 선을 느끼고 감동하게 되는데, 제자들에게 장부가 쇠뇌를 한번 당길 때는 한 마리의 새앙쥐를 잡기 위해서는 쇠뇌를 당기지 않는다. 만겁 성벽을 뚫을 때에 당겨라고 했다. 스케일이 남달랐다”고 했다.

김해에서 남명은 선비로서의 삶에 더욱 충실히 하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하게 된다. 새로 부임한 경상감사가 남명의 명성을 전해 듣고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청했지만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신산서원 산해정 뒤편에 복원한 사당.
신산서원에 걸려 있는 산해정 현판

◇김해를 떠나다

이 시기 남명에게 시련의 시간이 찾아왔다.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두었으나 하나뿐인 아들이 1544년 6월 어느 날 9세에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2살 때 결혼해 36살의 나이에 본 첫 아들이니 참으로 귀한 아이였다.

김경수 박사는 “아들 차산은 남명의 성품과 기질을 많이 닮았다. 그런 아들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니 걱정이 컸다. 선생 또한 9세의 나이에 병에 앓아누웠던 적이 있는데, 아들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남명은 이때 아들을 잃은 슬픔을 시로 남겼다.

‘해마다 길이 통곡하는 날은 6월 11일이라네’-남명별집 수록

같은 해,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했지만 불과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어린 명종이 즉위하게 되니 문정왕후의 외척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반대세력을 역모를 몰아 귀향을 보내거나 사사했다. 이때가 바로 을사사화(1545년)다. 바른말 하는 신하들이 대거 숙청당하고 귀향을 가자 조정은 간신배들이 설쳐댔다.

돈으로 벼슬을 사고파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남명은 친구 이림과 곽순, 성운 등 절친했던 벗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벗들의 억울한 희생에 세상을 향한 분노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이림은 7년 전 그를 관직에 추천했고 틈나는 대로 남명에게 서적을 보내준 벗이다.

같은 해 극진히 봉양하던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남명이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했던 모친의 영향이 컸다.

애당초 선생이 김해로 이주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요인도 모친의 봉양을 위해서였다.

여러 일련의 사건에 남명이 받은 충격은 컸다. 모친의 3년상을 끝내고 다시 김해로 돌아온 남명에게 새로 즉위한 명종은 전생서 주부에 임명한다는 벼슬을 하사했지만 거절했다. 대신 김해를 떠나 선산이 있는 합천의 본가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과 모친을 잃었기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남명의 아내는 따라가지 않고 김해에 그대로 남았다. 오래도록 비워있던 고향집을 손질하고 책과 필요한 세간들을 챙겨 이사했다.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김해로 왔을 때는 30세의 열혈청년이었지만 떠나는 순간은 48세의 중년의 나이었다.

김해에서 그는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뤄냈다.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수양에 매진해 그만의 학문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시작했다. 김해는 남명학파가 형성되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서서히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김해 신산서원 중 남명선생 시비-‘산해정에 대를 심으며’

(늘 푸른 대나무의 절개를 찬미한 시이다)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
바람 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남명을 알리는 사람들(2)

조희욱 수석장의
조희욱 수석장의

■김해향교 조희욱 수석장의

김해에는 신산서원이 있다. 신산서원은 남명이 생전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산해정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후학들이 그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조희욱(65)김해향교 수석장의는 “남명의 제자의 후손, 남명의 학풍을 존경하는 이들이 모여 신산서원 유계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제사를 지내고 강학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유계에는 200여 명의 인사들이 참여해 남명의 학풍을 기리고 있다.

조 수석장의는 “선생은 김해에 있는 동안 제자들을 양성하고 백성들에게는 미풍양속을 바로 세우고 일으킨 인물”이라면서 “오늘날 선생의 사상이 다시 재조명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추모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조 수석장의는 “임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직언하는 선생의 강직한 기상과 풍속이 어지럽고 효도사상이 쇠퇴해지는 요즘에 선생의 가르침이 아주 절실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면서 “신산서원 유계 회원들도 선생의 학문뿐만 아니라 도덕과 실천사상을 본받아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의검과 성성자

남명은 칼을 찬 선비로 통한다. 평소 뜻을 굳건히 하기 위해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칼은 장검과 단검 두 종류였다고 전해지며 1960년대 초까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칼자루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의 ‘의(義)’이다라는 글을 새겨, 경의검으로 불린다.

이 경의검은 선생의 사후 조선의 선비 사회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경의검을 본 느낌을 기록으로 남긴 경우도 있다.

장검은 최근까지 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장교가 가져간 것으로 전해지고 단검은 그 이후 분실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칼을 찍은 사진이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찍어둔 것이다.

남명은 칼과 함께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이 방울소리는 평소 선생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목적이다. 방울은 선생이 제자인 동강 김우옹에게 주었다고 한다.

지금 산청 남명기념관에 남아 있는 방울과 칼은 지난 2001년 남명 탄신 500주년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사진 및 자료제공=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성성자
경의검
복원된 경의검과 성성자
패검. 긴 칼은 6.25 당시 인민군 장교가 가져간 것으로 전해지고 짧은 칼은 그 이후에 분실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사진은 선생의 후손 고 조원섭 씨가 일제강점기에 찍어 둔 것이다. 사진 및 자료제공=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
서이군원길소증심경후 남명이 김해에 정착한 후인 1531년 동고 이준경으로부터 심경을 기증받고서 느낀 감상을 쓴 글로서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감 국역 남명집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번역문만 싣는다. 여기서 선생은 심경ㄹ에서 말하는 이 마음을 저버리면 자신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좌우명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진 및 자료제공=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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