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3)
[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3)
  • 임명진
  • 승인 2019.07.03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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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포위된 외로운 진주성
몰려드는 적의 기세에 믿었던 의병과 명군에게 외면당해
진주에 모인 왜적이 달무리 같이 성을 에워쌌다. 나머지 적들도 진주 지경에 가득차서 노략질을 하고 있다 -고대일록

10만이 넘는 적의 대병력은 19일 의령을 지나 진주로 시시각각 몰려오고 있었다. 앞서 진주성에서 나가 외곽에 포진한 전라병사 선거이 등은 진주성을 찾아 김천일 등 수성군에게 “적과 우리의 병력이 너무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 성을 나갔다가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권유했다.

이에 김천일은 크게 노하며 “절대로 성을 비울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과 명에서 제기한 성을 비우는 것을 두고 조선군과 의병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성을 비울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진주성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관군과 의병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달라진 적의 진격로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는 어떠했을까. 지승종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펴낸 ‘임진왜란의 전략적 요충지, 진주성 전투’라는 저서에서는 일본군의 이동경로가 지난 1차 전투 당시와는 사뭇 달랐다고 했다.

1차 전투 당시에는 곽재우가 지키는 의령 정진을 건너지 못하고 함안에서 지금의 진주시 문산읍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왔지만, 2차 전투 때는 김해, 창원을 지나 함안에서 의령 정진을 건너 곧바로 진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이를 현재의 지명으로 보면, 김해 창원(6월15일)→함안(16일) →정진
의령(20일)의령군 화정면 덕교리-설매재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집현면 신당리-장재동말띠고개(20일, 선봉 200여기)로 이동경로를 표시할 수 있다.

지 교수는 “일본군이 군사를 나눠 단성과 삼가 및 남강 건너편 등 각지에 진출시켜 진주성 주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1대는 2만 5624명의 병력으로 진주성 북면 일대를 맡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2만 6182명의 제2대는 진주성 서쪽 지역을 맡았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제3대는 1만 8822명으로 동쪽을, 모리 히데모토의 제4대(1만 3600명),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제5대(8744명)는 진주성 북쪽 등지에 일부가 배치돼 예비 병력으로 진주성 주변의 구원병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밖에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도라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육군과 함께 나아가 가덕도까지 진출하며 이순신의 수군을 견제했다. 이들 병력을 합치면 거의 10만에 육박하는 대병력이었다.

일본군은 1차 전투 당시 패전의 경험을 살려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진주성 주변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가면서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에 맞서는 진주성의 수성군은 관군과 의병을 포함해 7000여 명에 불과했다. 지난 1차 전투 당시 3800대 3만이라는 1대 10의 비율에서, 이번에는 7000대 10만이라는 병력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성내에는 수만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아군의 승전을 기원했다.

◇모습 드러낸 일본군
진주성 2차 전투의 일별 상황은 선조실록 등의 일부 문헌을 참고로 했다. 문헌에는 ‘21일 마침내 적의 선봉 부대가 동북쪽 산(마현, 말띠고개의 봉우리 추정)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의 기병이 말을 달리면서 그 위세를 과시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마현의 봉우리에 오른 적들은 높은 곳에서 진주성을 내려다보면서 성안의 수성군의 전력을 가늠했다.

일본군은 외부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진주성 주변 곳곳에 군대를 분산 주둔했는데, 그 병력이 사방 수백 리에 달했다. 진주성을 포위한 일본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노략질을 했다.

진주성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선은 거듭 명군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주의 일이 매우 위급하다. 지금의 적세를 보건대 실로 심상치가 않다. 적들이 만약 진주 근방에 있는 사방의 고을을 다 함락하고서 진영을 벌여 놓고 군대를 나누어 주둔시켜 내외의 교통을 끊고 지구전으로 오랜 시일을 두고 괴롭힌다면 아무리 성을 잘 지키더라도 종당에는 스스로 지쳐 죽고 말 것이니, 오늘날 진주를 구원하는 일은 일각이 급하다. 전에 이미 구원을 청하기는 하였지만 제독에게는 계속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니 함께 품첩을 보내도록 하라”-선조실록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3일 임금이 “제독에게 계속 구원을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함께 품첩을 보내도록 하라”고 승정원에 지시한 내용./자료제공=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당시 명나라군은 수백리 밖의 상주(왕필적 부대), 선산(오유충 부대), 성주(유정 부대), 경거창(이왕, 조승훈 부대), 남원(낙상지, 사대수 부대)등지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거듭된 원병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군과 의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명나라는 일본과의 강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시종일관 진주성 구원에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런 점이 조선군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은 전라도 운봉 등에 주둔하고 있었다. 지난 1차 전투 당시 의령의 곽재우를 비롯한 산청과 하동, 고성 등지의 많은 의병들이 진주성 구원에 나섰지만 10만이 넘는 일본군의 대병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고성의 의병장 최강과 이달이 이번에도 진주성 구원에 나섰지만 오히려 압도적인 병력의 일본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최강은 그를 따르던 300여 명과 함께 말을 타고 밤새도록 죽기로 싸워 많은 적을 물리치고서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경상순영록에는 진주의 생원 한계가 최강의 용맹을 칭송하는 글이 기록돼 있다. 2차 전투는 이렇게 그 양상이 지난 1차 전투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의병장 홍계남이 일본의 방해로 진주성에 접근하지 못하자,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포위 속에 있는 진주성이 마치 큰 바다에 뜬 외로운 배와 같았으므로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선조수정실록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진주성 2차 전투에 임한 의병과 관군들은 지난 1차 전투 당시처럼 외부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인접한 곳에 있었던 권율 도원수를 비롯한 순변사 이빈과 관군, 여러 의병 등이 일본군의 공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해 버렸다. 대구와 상주 등지에 주둔해 있던 명군도 수수방관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진주성 방어를 어렵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일본군의 이동경로(김해-진주)/사진=경남일보DB·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리지 종합정보 캡처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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