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
[특별기획]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
  • 임명진
  • 승인 2019.06.3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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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으로만 알려진 임진왜란 진주성 2차전투 그 투쟁의 이야기

 

진주성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임진왜란에서 일본과 두 차례의 대전투를 치렀다. 한 번은 대승을 거뒀고, 또 크게 패했다.
본보는 앞서 지난해 1차 진주대첩에 대한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이번에는 패전으로만 알려져 있는 2차 전투를 조명하고자 한다.

대승을 거둔 1차 전투와는 달리 진주성 2차 전투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가장 참혹했던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7000여 명의 의병과 군사가 일본군을 막다 장렬히 전사했고, 5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학살을 당했다.
왜 일본은 두 번이나 진주성을 공격했던 것일까? 과연 2차 전투는 온전히 참패로 기억되어야 할 전투인 걸까?
이 같은 의문에 답하기 위해 본보는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다시 전운이 드리운 진주성

“진주성을 포위하여 모조리 죽여라” 일본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핵심 가신들에게 진주성 재침을 명령하는 지령에는 이 같은 끔찍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실상 이 명령서에는 진주성을 향한 도요토미의 분노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왜 다시 진주성일까? 시간을 거슬러 1592년 10월, 조선에서 날아온 급보에 일본의 본거지, 나고야성에 주둔하던 도요토미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진주성 전투에서 무참히 패했기 때문이다. 3만의 병력에도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진주성의 조선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당시의 패배가 도요토미에게 크나큰 충격을 준 것은 최측근 가신 등에게 1593년 2월부터 수차례 하달한 지령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도요토미는 모두 15개항에 걸쳐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진주성과 관련된 내용이다. △진주성을 총격해서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일 것 △진주성을 함락시킨 뒤에는 전라도를 공략할 것 △전라도를 공략한 뒤에는 부산과 연결되는 성을 쌓고 지킬 것 등이다.

도요토미의 거듭된 명령에 일본군들은 다시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0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3만의 병력이 동원된 1차 전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병력이다.

사실상 조선에 주둔한 전 병력이 투입됐다. 이들을 지휘하는 장군들도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장수들이 총출동했다.

도요토미는 전투에 소극적인 부하들의 영지를 몰수하는가 하면, 일부 장수들에게는 공적을 쌓지 못한다면 가문을 멸문시키겠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도요토미의 기세에 일본군은 반드시 진주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일본은 왜 다시 진주성에 칼끝을 돌렸나

왜 일본은 또다시 진주성 공격에 나섰을까.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1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불과 두 달여 만에 파죽지세로 평양과 함경도까지 점령했다. 조선의 전국토가 함락당할 것처럼 보였지만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진격은 주춤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 1592년 10월 진주성에서 대패를 하고 1593년 1월에는 조선과 명의 연합군에 평양성을 내주고 서울까지 밀려났다.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그동안 절대 우위에 있었던 군 전력도 비등해지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일본은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에 반격을 가했지만 조선군과의 행주산성에서 또다시 대패를 당했다.

둘째,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배후를 괴롭혔다. 부산에서 출발한 보급부대가 평양과 서울까지 가는 도중 수시로 공격을 받았다.

더 이상 공세를 펼칠 여력이 없었다.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땅이 필요했다.

셋째, 일본은 시간을 벌기 위해 명나라와 강화협상에 나섰다. 후퇴하는 배후를 치지 않겠다는 명나라의 약속을 받고 서울을 내어주고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거센 반발에도 더 이상의 군사적 손실을 바라지 않았던 명나라는 이를 묵인했다.

주목할 점은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당초 명의 정벌을 위해 길을 비켜 달라며 조선을 침공했던 일본은 개전 1년여 만에 수세에 몰리면서 목적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강화협상에서 최소한의 성과로 조선의 남부 4개도는 할양을 받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넷째, 이런 모든 목적을 충족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부산과 인접한 곳에 있었다.

지난 1차 전투에서 패배를 안겼던 진주성, 호남으로 넘어가는 관문에다 그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의병들의 본거지로 여겼던 진주성이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진주성이 확보되면 전라도, 경상도, 부산을 잇는 교통로가 연결된다. 이곳에 성을 쌓아 지키겠다는 것은 바로 조선 남부의 할양을 현실화 하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작용했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곡창지대인 호남 장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길목에 있는 진주성은 1차 전투 패배에 대한 설욕과 군량 부족 등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강화협상에서 조선남부 4도 할양을 요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글 싣는 순서
총괄-다시 전운이 드리운 진주성
1편-일본의 협박, “진주성을 비워라”
2편-죽을지언정 진주성을 포기할 순 없다
3편-고립된 진주성, 시작된 10만 일본의 총공세
4편-치열한 공방전, 그들의 처절한 싸움
5편-기다리던 지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6편-고귀한 충절은 남강에 드리우고
7편-끝내 무너진 진주성
8편-대첩과 대패, 앞으로의 과제
9편-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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