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⑭김해
[특별기획]경남의 3·1독립운동 ⑭김해
  • 박준언
  • 승인 2019.03.1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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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 삼계동 화정공원에 세워져 있는 ‘고파 배치문 독립운동가 기적비’. /사진제공=김해시


김해는 조선에서 약탈한 식량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식민지 농업 침탈의 주요 거점이었다. 때문에 강력하고 공세적인 만세 시위의거가 일어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여학생, 부녀자들이 만세의거를 적극 계획하고 주도해 식민지 지배에 압도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김해에서는 김해읍내에서 최초의 만세시위를 한 것을 기점으로 장유, 진영, 생림 등지로 퍼져나갔다. 만세시위는 주로 각 지역 거점 시장 ‘장날’ 전개됐으며 일회성이 아닌 연속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숨은 젊은 애국지사들의 노력과 우국충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해읍내 만세시위

1919년 3·1일 서울에서 시작된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한반도 줄기를 타고 김해에 도착한 시각은 그로부터 30여 일이 지난 3월 30일이었다.

그날 김해 읍내에는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주민들이 일제히 궐기해 ‘전쟁’을 방불케하는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김해 최초의 만세의거 주도자는 당시 서울 정신여학교(현 정신여고)를 다니던 ‘구명순’이었다. 20살에 불과했던 구명순은 서울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잇따라 일어나는 것을 보고 고향인 김해로 귀향해 부녀자들을 상대로 만세의거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이때 세브란스 의전 학생이었던 배동석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만세의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또 배덕수가 읍내 주변 10여 개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마침내 3월 30일 오후 9시 무렵 김해군청 앞에서 김해 최초의 조선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김해 최초의 만세시위는 그렇게 서슬퍼런 일본의 감시속에서도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놀란 일본 헌병대가 진압에 나서고, 검거를 면한 주동자들은 다시 거사일을 정하고 비밀리에 준비에 들어갔다. 허병은 집에서 태극기 수십 기를 제작하고, 최계우는 태극기를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다.

4월 2일 오후 읍내 장에 장꾼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4시께 주도자들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일본 헌병은 군인을 비롯해 불량배까지 총동원해 진압에 나섰고, 읍내 장은 폐쇄됐다.

4월 16에도 읍내에서 약 6㎞ 떨어진 이동리에서 부녀자 50여 명이 산 위에 올라가 만세의거를 벌였다. 당시 일제는 시위대를 향해 무단 발포해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진영지역 만세시위-젊은층의 궐기

진영은 개발 이익을 노린 일본인 자본가들이 일찍부터 진출해 경제적 수탈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인 소유 토지가 증가하는 만큼 조선인 소작인이 급증해 이에 따른 갈등도 증폭됐다.

진영 만세운동은 김해읍내 만세의거 하루 뒤인 3월 31일 전개됐다. 하계면 서기로 재직 중이던 김우현(24)이 같은 마을의 김정태(20), 김성도(26), 김용환(21) 등과 모의했다.

이들은 거사 당일 진영시장에 모인 장꾼들에게 ‘독립만세’가 적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만세의거를 주도했다. 김해헌병분견소장이 적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시위대 규모는 20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은 참가자 수를 200명으로 축소해 보고했다. 진영시장에서 일으킨 1차 만세의거 주동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지만 20대 청년들이 독자적으로 주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진영에서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4월 3일 300여 명이 다시 시위를 일으킨데 이어 4월 5일에는 2000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4월 5일 만세의거는 당시 하계면 한문서당 학생이었던 안기호(17)와 김종만(17)이 주축이 됐다.

이들은 특이하게 의병 창의의 방식을 본 떳다. ‘독립군대장 안기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에 나선 군중들은 일본 헌병들이 폭력을 가하자 헌병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이 시위는 유생들이 중심된 것으로 당시 일제는 9명의 헌병을 진영으로 파견해 밤낮으로 경계했다.



◇장유의 만세운동-김해 최대규모 시위

4월 12일 일어난 장유지역 만세운동은 학자들이 주축이 됐다. 김종휜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장유 유하리에 ‘신문의속’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애국계몽 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또 김승태는 전통학문에 정진하는 유학자였다. 김종휜은 고종의 인산 참석차 서울에 갔다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만세의거에 가담한 뒤 독립선언서를 옷 속에 숨겨 내려와 김승태, 이강석, 김용주, 조용우, 조항래, 최현호 등과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 당일 김종훤과 김승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때 동참한 주민이 3000명이 넘었다. 당시 손명조, 김용이, 김선오가 제지하는 일본 헌병의 총을 뺏으려다 순국했다. 성난 주민들과 가족들은 이들의 시신을 업고 “왜 죽였느냐”며 일본 헌병 주재소를 부숴버리기도 했다.

김해지역 최대규모인 장유지역 만세의거는 이튿날 총독부에 보고됐다. 1919년 4월 18일자 ‘매일신보’는 장유지역의 만세운동을 ‘김해의 폭동’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장유지역 만세의거는 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 여사가 직접 작성한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내방가사에는 당시의 상황과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유족들은 지난 2005년 3·1운동 기념식장에서 김해시에 기증했지만 관리 소홀로 분실된 상태다.

박준언기자



 
김해시 내동동 산 49-1번지에 세워져 있는 3.1운동 기념탑. /사진제공=김해시


※김해 출신 만세운동 애국지사들

-배동석-

김해지역 만세운동 배후에는 남녀와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김해 최초의 만세운동인 김해읍내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배동석’은 당시 세브란스 의전(현 연세대 의대) 학생이었다.

김해 동상동 출신인 배동석은 3·1운동이 벌어지기 전 이미 학생단 대표의 한 사람이자 서울에 유학중인 경상남북도 학생들의 친목단체인 교남학생친목회 회장이었다. 그는 민족대표들의 3·1운동을 기획하고 비밀 사자가 돼 경남의 지도층 인사를 설득하는 사명을 수행했다. 또 김해, 마산, 함안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일제에 체포된 배동석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보를 발설하지 않은 탓에 두 눈과 손발톱이 뽑히는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후유증으로 일찍(1924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와 함께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이가 바로 ‘유관순’ 열사다.



-배치문-

김해 한림면 안하리 출신(1890년)인 배치문은 전라남도 목포에서 3·1운동, 청년운동, 의열단활동, 노동, 언론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목포의 3·1운동인 4·8 만세운동을 주도해 목포 중심가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체포됐다.

1921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23년 상해임시정부의 국민대표자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해 의열단과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했다.

1928년 체포된 그는 1929년 석방 뒤 신간회 목포지회 활동과 광주독립운동 여파로 발생한 목포학생사건을 주도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호남평론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도 활동한 그는 1941년 일제의 대동아 전쟁에 대한 발언으로 체포돼 1942년 목포교도소에서 옥사했다.



-이윤재-

한뫼 이윤재 선생은 3·1운동에 참여한 한글학자다. 북경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민족주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1943년 12월 8일 함흥감옥에서 옥사했다.



이밖에도 김해 3·1운동 기념탑에는 임학찬, 배덕수, 박덕수, 배순복, 허종식, 허병, 최덕근, 김석암, 조병중, 최계우, 송세탁, 송세희, 이수태, 김성수, 김정태, 김용환, 안기호, 김종만, 강석, 김용수, 조항래, 최현호, 조용우, 이학도 등이 조국의 독립운동에 열정을 받친 인물로 기록돼 있다.


 
1931년 9월 29일 서대문경찰서가 주요감시 대상으로 지명한 ‘배덕수’ 독립운동가에 관한 감시카드. /사진제공=김해시
   
1934년 6월 16일 일본경찰이 작성한 ‘안삼원’의 감시카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안삼원의 직업은 ‘철공’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제공=김해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강영순’의 감시카드. 1923년 종로경찰서가 작성했다. 강영순의 직업은 ‘땔감 장수’였다. /사진제공=김해시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광호 회장
3.1운동은 건국(建國)과 같은 의미...새로운 100년 주인공 준비해야


“3·1운동은 우리나라를 새로 건국(建國)한 것도 같은 역사적인 것으로, 민초(民草)들이 한마음으로 나선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사건었다.” 김해3·1운동기념사업회 김광호 회장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의 대의명제를 ‘건국’에 비유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뿌리를 내렸고, 어떻게 생겼는지 고찰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3·1의 참뜻을 잊고 있는 국민들이 많다는 점에 안타까하며, 이는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등한시한 부분도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해방 이후 민족주의자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의해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고, 뒤이어 군부세력의 등장 등으로 올바른 역사가 단절됐다. 굴곡의 역사, 혼돈의 시대를 지나면서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노력들이 좌절됐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교육은 100년을 바라보고 하는 것인 만큼 초등학교부터 역사 교육 비중을 크게 두어 참다운 교육을 해야한다. ‘가치’로서 지녀야 할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김해 지역 3·1운동의 특징에 대해서 위민(爲民)이라고 설명했다. 김해는 1919년 3월 30일 김해 읍내에서의 첫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다음 날 진영, 이어 장유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배동식 지사, 조부 김정태 지사 등 애국지사들은 밤세워 태극기를 만들고 주민들을 독려하면서 철저히 ‘무저항, 평화시위’를 주창했다. 일본군이 발포할 경우 사람들이 다치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김해지역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 올해 8·15 광복절에 맞추어 ‘김해시3·1독립운동기념사료집(가칭)’을 발간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사료집이 될 것이다. 내용은 300~500페이지 분량이다.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고 밝혔다.

또 김해지역 3·1운동에 참여했던 인물과 관련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념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김 회장은 “허성곤 김해시장도 ‘가야왕도 김해’에 걸맞은 기념관 필요성에 동의했다. 독립적인 기념관이든 아니면 시립박물관 내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생각이다”고 전했다. 사업회는 ‘역사유적지 답사’, ‘세미나’, ‘심포지엄’ 등 김해지역 3·1운동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100주년 3·1운동의 상징적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주인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깊이 고민해보고, 새로운 100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준언기자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광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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