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8 (60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8 (609)
  • 경남일보
  • 승인 2018.03.1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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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자매들끼리 싸우다가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수치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까봐 눈을 뜨기도 부끄러운 가운데 한없는 회한만 밀려오고 밀려갔다.

‘아, 생이란 이렇게 후회로 마감하게 되어있는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우직하고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의 기반에다 내가 공부하고 습득했던 모든 능력과 정서를 접목시킨 멋진 생을 한번만, 다시 한 번만 살고 싶구나. 만약에 다시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식을 낳아서 애정의 눈길로 어루만지면서 길러 나같이 덜떨어진 자식은 되지 않게 해보고 싶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실천해 보이고 싶다.’

자신을 끌어들이는 침잠의 늪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가운데 메마른 뺨을 스치고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렇게 어이없이 세상 끝나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며칠 후, 양지는 죽음의 문턱에서 희미한 의식을 되찾았다. 의사는 패혈증을 조심해야된다는 진단을 내려놓은 상태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병상을 찾아 온 아버지는 여러 줄의 의료용 호스로 연결된 채 겨우 숨결만 내쉬고 있는 양지를 향해 숨겨온 사연을 털어놓는다.

“호냄이 말 들으니 니가 하고 접은 일이 있담서?”

-제가 무슨 일을 한다고 했는데요?

친절해지지 않는 양지의 반박에도 아버지는 전처럼 대뜸 노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앉은 자리에서 좀 떨어진 양지를 응시하는 모습은 연민과 이해의 숙지근함이다.

“그게(호남이가) 첨이라 아직 조갈증이 덜 풀린 기라, 양껏 마시고 갈증이 멈추면 될끼라. 지 재산 물리 줄 자식이 있나 딸린 가족도 없는데 그 년 성질 모리나, 니가 낸 뜻이 너무 커서 끌어안기 버겁고 샘도 나서 그렇지만 결국은 실그머니 도와줄기다.”

양지는 그냥 듣고 있을 뿐이다. 다른 누구한테 응원을 청할 생각도 접은 터여서 아버지의 위안은 더욱 공소하다. 양지 역시 호남의 변화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지내는 동안 왠지 급했다. 천지개벽을 예감하는 미물들이 그러하듯 이유 없이 조마조마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만 간절할 뿐 여러 개의 생명줄에 매달려 겨우 연명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

일인 극 배우처럼 다시 서두를 먼저 떼고 난 아버지는 뒤적뒤적 안주머니를 열고 반으로 접힌 작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쪽저쪽을 뒤집어서 확인하듯 둘러본 아버지가 아무런 의사소통도 안 되는 양지에게로 그 봉투를 내밀었다. 양지가 손을 내밀거나 안색이 달라지는 것조차 보일 리 없자 아버지 스스로 설명을 했다.

“사실은 네 에미도 모르게 숨겨 놓았던 선산 한 자락이 있었는데 그 선산을 팔았다.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서 이 돈으로 니하고 싶었던 일 하는데 보태라꼬 여기 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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