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거리가 멀수록 안전은 가까이?

윤상보 함양백전초등학교 교사

2024-09-01     경남일보


고속도로에서 눈에 띄는 현수막 문구가 하나 있다. ‘거리가 멀수록 안전은 가까이.’ 난 20년 간 운전을 하며 단 한 번도 사고가 나본 적이 없다. 부끄럽게도 운전 중에 한 번씩 딴 짓을 하고, 과속을 할 때도 있지만 반드시 꼭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차간 안전거리 확보’다. 내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생명줄인 것이다. 안전거리 확보는 평소 삶 속에서도 적용되는 듯하다.

먼저, 사람들과의 관계다. 평소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호의적이지만 내가 사랑이 많고, 속이 깊어서가 아니다. 이유는 반드시 어느 이상의 거리를 유지한 채 만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에, 생각에, 삶에 푹 빠져 함께 하지 않고, 그럴싸한 말로 다가가는 척만 하고 스리슬쩍 빠져나온다. 그러면 나는 휘둘리지 않고 안전하다.

업무를 할 때도 안전거리는 유지된다. 직장에서 일 못한단 소리를 아직 들어본 적은 없다. 이 또한 진짜 일을 잘해서가 아니다. 그저 이전 담당자의 업무 내용을 토대로 주변 동료들의 생각을 입혀 그럴싸하게 계획서를 만들어 일을 마무리한다. 그러면 나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안전하다.

수업을 진행할 때도 교사 주도의 일방적 수업은 참 편하고, 안전하다. 왜냐하면,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이 많을수록 수업의 흐름은 항상 유동적이어서 반드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이는 교사의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수업 중 학생들과의 안전거리가 확보되면 나의 수업은 안전하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운전처럼 정말 안전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저 겁이 많은 것이다. 그저 상처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저 가진 걸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나는 성장·성숙보다는 현 상태의 유지에 많은 에너지를 써 왔다. 나에게 당면한 과제를 힘내어 도전하지 않으면서 여러 요령으로 얻어낸 껍데기 성과를 가지고, 내가 해낸 것인 양 자랑스러워했다. 그동안 안전거리 확보란 명목으로 내 삶의 다음 걸음을 회피하고 있었다.

거리를 둔 만큼 주체적인 삶의 온도는 점점 더 낮아진다. 낮아진 삶의 온도는 온전한 나의 모습을 점점 사라지게 만든다. 삶의 소중하고 귀한 순간들을 스스로 겁내어 놓치고, 더 이상 힘없이 지나가게 만들 순 없다는 생각이 뚜렷해지는 요즘이다. 차량 운전 시 차간 안전거리 준수는 있을지언정, 이제 내 삶의 인생 경로에서는 ‘안전을 가장(假裝)한 비겁한 거리두기’를 용기 내어 좁혀 나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