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섬 늑도[2]철로 된 칼, 선진문물을 팔았다

섬에 남겨진 낯선 유물들 늑도는 무엇을 주고 낙랑과 왜는 무엇을 받았나

2024-07-08     임명진
학계에서는 한중일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과 유적들이 늑도에서 대거 출토된 것은 당시 늑도가 일종의 국제무역항으로서 기능을 했다는 증거로 보고 있다.

일본계 야요이 토기, 중국계 낙랑토기, 진한시대의 화폐인 반량전과 오수전 등 동아시아의 문물이 모두 출토되는 늑도는 오늘날 홍콩의 모습과 비슷한 풍경을 보이지 않았을까?

낙랑과 야요이 상인들이 수시로 늑도에 드나들었고, 다른 나라 상인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섬에서 장기 체류도 했다. 그렇게 늑도는 번창해 나갔을 것이다.



◇해상무역 장터는 무엇을 거래했을까?

그렇다면 2200년 전 한반도 남해안의 작은 섬 늑도까지 온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은 무엇을 교역했을까?

늑도가 번성하던 시기는 지금과 같은 국가 개념은 없었던 시절이다. 한반도 남부의 변한, 마한, 진한도 각각 수십여 개의 소규모 부족국가 연맹체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늑도가 국제적인 교역을 했다면 무엇을 주고 받았는지 호기심이 인다.

당시의 해상무역로는 중국과 한반도의 선진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특산물을 비롯해 한나라 시대 거울인 ‘한경’, 장신구 등 다양한 물품들이 물물교환의 형태 등으로 교역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늑도는 출토되는 유물의 양은 단위면적당 한반도에서 가장 많다. 당시에 늑도의 번창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들로는 당시에 무엇을 거래했는지, 교역 물품을 정확하게 추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물물교환은 서로 대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창희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교수는 “늑도에서 서로 무엇을 주고 받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없다. 중국계 유물로 값비싼 거울인 한경이나 화폐 등이 나왔지만 일본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일본의 물품은 썩어 없어지는 것, 음식이나 의류, 특산물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부분은 여러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변한의 ‘철’ 모두가 바랐던 교역품

단서가 되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중국측 사서인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변한에 철이 생산돼 한, 예, 왜가 모두 이곳에서 철을 구하고 낙랑, 대방에도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철은 오늘날로 치면 반도체에 해당하는 최고의 선진 문물이었다. 한반도에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철기가 전래되기 시작하지만 철 제품은 워낙 귀해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청동이나 석기류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철 제품이 주로 최고권력자의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늑도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철기류가 사용된 흔적들이 일부 나온다.

사슴 뿔에다 칼날이 있는 철을 끼워 사용한 소도자가 대표적이다. 소도자는 손 칼로 일종의 만능도구에 해당한다. 다른 도구를 만들거나, 해안에서 조개를 딸 때도 사용하는 도구다. 이외에도 도끼의 날로 쓰이거나 철 제품의 소재로 쓰이던 판상철부도 발견됐다.

만약 역사의 기록대로 변한의 철 제품을 늑도에서 교역을 했다면 늑도에는 대규모 철 생산 시설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흔적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늑도에서는 제철과 관련된 유물로는 화로, 송풍관을 비롯한 철 찌꺼기가 일부 나오고 있지만 대규모 제련단지나 철광지의 흔적은 없다.

그래서 철 제품을 늑도에서 거래했다면 대부분 외부에서 만들어진 완성품을 가져와서 교역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홍보식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늑도가 있는 변한은 주거래 상품이 철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사치품을 가져오고, 왜의 상인들은 특산물을 가져와서 늑도에서 철과 바꿔가거나 필요한 물품으로 물물교환을 하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그런 식의 무역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상인도 눌러 앉은 철의 무역시장

그렇다면 2200년 전 늑도는 어디에서 철을 공급 받았을까? 낙동강 유역을 따라 함안과 창원, 김해, 고성 등지에는 고대의 제련시설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에는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찌꺼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 제련 유적과 늑도와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학자들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발달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변한의 철이 해상 루트를 통해 일본이나 다른 지역에 수출되었다면 교역시장이 열리는 무대가 필요했고, 늑도가 그 중에서도 규모 있는 거점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특히 제철 기술을 갖지 못한 일본은 변한의 철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역을 위한 전문 상업이나 수공업 집단이 늑도에 거주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가 바로 늑도에서 대량 출토되는 일본계 야요이 토기들이다. 야요이 토기가 늑도에서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는 점을 선진문물인 변한의 철과 제철기술을 얻기 위해 당시 야요인들이 늑도에서 장기적으로 체류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수홍 울산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은 “늑도 유적이 특이한 점은 일본계 토기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만큼 일본계 상인들이 많이 왔다는 건데 철과 관련한 상인이나 수공업 집단이 섬에서 장기체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인터뷰>“늑도에 이주 일본인 마을도 있었을 것”

이창희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늑도에서 출토된 유물중에서 가장 비중이 많은 것은 단연 토기다. 그런데 토기는 서로 교환하는게 아니다. 토기는 저장하는 것이다. 늑도는 토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단순히 중국, 한반도와 교역을 한 것이 아니라 일정 집단이 아예 늑도에서 장기간 거주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특히 늑도에서 발굴된 주거지에서 생활용품에서 제사용품까지 풀세트로 일본계 토기가 발굴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당시 늑도에는 마치 LA 한인타운처럼 일본계 상인들이 마을을 이루며 장기간 체류를 했을 것으로 추정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주’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대 늑도는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국제 중계무역을 위해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교역이 점차 더 활발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통역을 해 주는 사람, 숙박업을 하는 사람, 그들에게 생필품을 제공하는 집단도 생겨나면서 고대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늑도는 일부분만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양도 어마어마하지만 아직 미발굴지역인 섬의 핵심부지가 남아 있다. 앞으로 어떤 유물과 유적이 나올지 정말 미스테리한 섬이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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