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문이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
단단하게 기억된 번호를 계속 눌렀지만
빽빽 비명만 질러댈 뿐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열수 있었던 번호가 무효로 확정되자
문 안팎은 이승과 저승처럼 멀어졌다
오래된 가을
아버지는 출입문을 나선 이후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으신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리신 모양이다
-------------------------------------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 봐도 속수무책이다.
익숙한 숫자들을 조합해 보고 어림해 보지만
당황스러운 결과는 매한가지
망연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한심한 스스로를
질책한 적이 있었다.
내 안식을 구할 곳이 지척인데
벽 하나를 두고 피안의 경계에서 헤매는 꼴이었다.
어쩐지 가을은 어디로 보내고 가는 느낌의 계절이다.
적어도 마중을 하고 오는 행색은 아니다.
빈자리가 더 넓어지고 휑한 바람결에
소중한 것들이 얇아져서 종래는 마멸되는 느낌이다.
구름도 옅어져 푸른 하늘
그 얇은 간격의 벽을 두고
아버지도 이승으로 돌아오시는 대문의 비밀번호를
깜빡. 잊으신 모양이다.
경남시인협회장
저작권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