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8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81)
  • 경남일보
  • 승인 2017.03.29 17: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81)

호남이 보다 먼저 순순히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의 어디선가 파스 냄새가 났다. 좀 특별한 체취였지만 두 딸 중 아무도 그 냄새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양지는 호남이까지 기어이 밖으로 내몰고 문을 닫았다. 세상이 왜 이리 복잡한가. 어디 한 군데 맘 편한 곳이 없고 곳곳이 가시방석이다. 벽을 짚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또 그런 증상이 일어났다. 좀 전까지의 소란이 남의 일이었거나 소리 없는 영상을 관람한 듯 멀게 느껴졌다. 이건 정상인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그럼 혹시 꿈을 꾸고 있는가. 그녀는 멍하니 발밑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질척하게 번져있는 주사액과 유리병의 파편 위로 형광등의 불빛이 반사되어 눈을 어지럽게 한다. 그렇지. 저걸 치워야한다. 복도 끝 화장실에 있던 청소 용구를 생각해 낸 양지는 문을 열고 나왔다.

밀대를 들고 나오는 호남과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다.

“가라니까 안가고 뭐해. 아버지는?”

“갈바서 되나. 달래서 보냈지.”

양지는 얼른 어두운 바깥을 일별했다. 왜 인지도 모르게 아버지를 혼자 보내고 돌아와 준 호남이 밉지 않았다.

“영감이 말이다 심심하모 강짜를 부린다. 같이 놀자하고 좋게 달래야지, 당신 고함 소리에 절절 기고, 우리가 언내가?”

킬킬 웃는 호남은 벌써 아까 양지와 있었던 언쟁에 대한 기억까지도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없는 것 같이 쉼 없이 쫑알거렸다.

“언니 니 썽깔 그래갖고 평생 살 안 찐다. 짖는 개보다 앓는 개가 더 무섭다카더마 아부지가 와 니 앞에서는 기가 죽는지 인자 알것다.”

깨어진 유리병을 치운 호남은 간호사를 데려왔다. 실수로 병을 깨뜨렸다고 하자 간호사는 다시 약병을 걸었다. 똑 똑.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사액이 떨어지자 다시 말없는 병실에는 표면적인 평화스러움이 깃든다. 아버지와의 언쟁에 지쳤던지 호남이도 환자처럼 옆 침상에 번듯하게 누워 눈을 감고 있다.

니는 그래도 배운 것도 많고 사회 물도 많이 묵었시니 그래도 뭣이 좀 나을 끼라고 여겼더마…. 화났던 아버지의 음성이 양지의 내심에서 깐질깐질 미늘을 드러냈다. 양지는 호남을 돌아보았다. 서울. 생의 성공은 모두 서울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중에 호남이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호남이 그녀가 매스컴을 통해서 듣고 본 훌륭한 여자들은 대개 서울에 있었다. 하지만 서울, 그 곳의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서 호남의 언니 최 양지는 모래밭의 한 작은 모래 알갱이일 뿐이었다. 양지는 그래서 호남에게나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며 살았다. 모범 답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완벽한 정형이 있는 것도 아닌 그 일. 삶이란 정말 너무 어렵다. 주영을 데려다 길러라. 양지가 그랬듯이 아버지도 그랬다. 모처럼의 일치된 뜻이었다. 손위들의 일치한 뜻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호남은 주영을 데리러 갈 것 같지 않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호남의 광대뼈가 내리비치는 빛을 받아 더 고집스럽게 도드라져 보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